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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리목

by 솔라담



싱그러운 꽃향기가 가득한 5월의 결혼식장.
갓 서른을 넘긴 동생의 결혼식이다.

진부한 '5월의 신부'가 아닌, 당당한 '5월의 신랑'이랄까.
아직 리허설일 뿐인데도 동생은 햇살 아래 가장 당찬 모습으로 단상을 향해 걸었다.

하객들의 축복과 웃음소리가 홀을 가득 메웠지만,
나는 어쩐지 이 모든 소음에서 한 발짝 비껴 나 있는 기분이었다.

얼마 전, 2년간 만난 남자와 헤어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결혼을 원했고, 그는 확신이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10년 전, 똑같은 이유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던 내 모습이 떠올라
씁쓸한 실소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지금 10년 전 일이 유독 선명하게 떠오른 건,
단지 최근의 이별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 멀리서 하객들에게 손을 흔드는 오늘의 사회자.
그가 바로 내가 상처 줬던 '그'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서른을 훌쩍 넘기고 나면 더 이상 크게 놀랄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운명은 잊을 만하면 이렇게 짓궂은 장난으로 제 존재를 드러내곤 한다.

결혼식이 시작되고, 그가 단상 위로 올라섰다.
동생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재미있고 능력 있다는 거래처 대표님.

멀끔한 슈트를 차려입은 그가 마이크를 잡고 유쾌하게 입을 열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마이크를 뚫고 나올 만큼 우렁찬 중저음.

"신랑이 아주 익숙한 듯 보무당당하네요. 처음 맞... 죠?"

짓궂은 농담도, 사람을 휘어잡는 목소리도 그대로구나.

신부 입장곡이 울리고,
모두의 축복과 환호 속에서 나만 홀로 10여 년 전 대학 시절의 우리를 떠올렸다.




스물하나의 나와 스물셋의 그.
지금 생각하면 풋내 나는 나이였지만,

그땐 군대를 갓 전역한 그가 어찌나 어른 같아 보였는지.

서로가 세상의 전부였던 우리는
정말 불같이 사랑했다.

각자의 집에서 20년간 배운 익숙한 문화를 '옳음'으로,
서로의 다른 방식을 '틀림'으로 규정하며 맹렬히 싸웠다.

그러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의 모난 구석까지 미친 듯이 사랑하곤 했다.

돌이켜보면, 이십 대의 그는 유독 별나고 독특한 사람이었다.

"난 왼손잡이야."

패닉의 '왼손잡이'를 주제가처럼 부르던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왼손잡이의 논리로 설명하곤 했다.

어릴 적 오른손으로 글 쓰는 법을 배웠음에도,
굳이 왼손으로 비뚤비뚤한 글씨를 썼고,
밥을 먹는 것도, 공을 던지는 것도 모두 왼손이었다.
왼손잡이라서 그렇다며 시계는 늘 오른손 손목에 찼다.

그 외에도,
모두가 열광하는 흥행 영화 대신 아무도 모르는 독립 영화만 찾아봤고,
축구보다 미술관을 즐겼으며,
길가의 어려운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내가 사준 우산조차
지나가는 여학생에게 줘버려서
내게 얼마나 혼이 났는지 모른다.

이런 작고 사소한 '남다름'들이
내가 그를 사랑했던 수많은 이유 중 하나였다.

그의 독특함은 연애 방식에서도 드러났다.

우리는 커플링을 맞췄지만, 그는 반지를 손가락에 끼지 않았다.
구속당하는 느낌이 싫다는 게 이유였다.

평생 손가락에 낄 반지는 결혼반지 하나면 족하다나, 뭐라나.

결국 그는 은색 체인 목걸이에 자신의 반지를 꿰어 가슴팍에 걸고 다녔고,
그 고집 때문에 우리는 몇 번을 싸웠는지 모른다.

나란히 낀 반지를 보며 안정감을 느끼고 싶었던 나와,
그런 형식에 얽매이기 싫다던 그.

"난 반지를 오른손에 껴야 하는데, 넌 왼손에 끼잖아.
그럼 우리가 손을 잡으면 반지가 부딪혀서 상한단 말이야."

어느 날,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다가
내 반응을 보고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반지는 손가락이지만, 목걸이에 걸면 그건 내 가슴이야.
나는 내 심장에 너를 걸고 다니는 거라고."

본인도 실소를 참지 못하던 그 말장난에,
화를 내던 나도 결국 웃음을 터뜨리며 넘어가곤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구속을 싫어하던 그는 연애 3년 차부터 집요하게 결혼을 이야기했다. 나름 어린 나이에 성공했다지만, 스물여섯의 그가 스물네 살의 내 귀에 속삭이는 미래는 너무 무거웠다. 아이의 이름까지 정해뒀을 정도로 선명했기에 더욱더...

반지의 구속은 거부하면서도 결혼이라는 거대한 굴레로 나를 옭아매려는 모순. 나는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고, 결국 도망쳤다.

'아직 어리다'는, 가장 비겁하고도 솔직한 이유를 방패 삼아서.

서로 깊게 만난 첫 연인이라서였을까.
우리는 마치 서로에게만 맞춰 휘어진 나무 같았다.

각자의 모양대로 비틀리고 구부러졌지만,
그 비틀린 틈을 서로의 줄기로 단단히 채우고
뒤틀린 가지에 기댄 채, 위태롭게 한 그루인 척 서 있었다.

그렇게 하나처럼 엉켜버린 그와의 이별 후,
나는 만나는 남자들에게서 무의식적으로 그의 그림자를 찾았다.

그의 독특함, 그의 고집, 심지어 그의 모순까지도.

하지만 누구도 그처럼 완벽하게 내게 맞춰 휘어져주지 않았고,
나 역시 홀로 휘어진 채 살아가는 것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누나, 뭘 그렇게 멍하니 있어?"

어느새 1부가 끝났나 보다.
상기된 동생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다.

"여기 오늘 사회 봐준 형이야. 내가 얘기한 적 있지? 형, 여기 우리 누나예요."

10년 만에 마주한 그는,
내가 기억하는 스물여섯의 모습보다 훨씬 더 여유로운 어른이 되어 있다.

날카롭던 눈매는 부드럽게 정돈되어 있고,
장난기 가득하던 웃음은 여유로운 미소로 바뀌어 있다.

하지만 굳이 오른손 손목에 채워진 시계가,
그가 여전히 '그'라는 사실을 선명하게 증명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사귈 내내 진절머리가 날 만큼, 지긋지긋하게 컸던 목소리.

그 우렁찬 음성이 마이크도 없이 바로 내 귀에 꽂히는 순간,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벼락처럼 되살아난다.




시끄러운 대학 축제의 밤.

술에 거나하게 취한 그가 무슨 용기였는지
주점가 한가운데 풀밭으로 뛰어들었다.

근처 가게에서 빌려온 확성기를 들고, 나를 향해 외쳤다.

"내 사랑! 사회학과! ㅇㅇㅇ에게 이 노래를 바칩니다!"

엉망인 음정으로 '넌 내게 반했어'를 부르던 그의 모습에 모두가 웃었지만,
나는 얼굴이 터질 듯 화끈거렸다.

심지어 그 확성기는 고장 난 상태였고,
그의 목소리는 생목으로도 그 시끄러운 축제 현장을 완전히 장악하고야 말았다.

노래가 끝나고, 그는 땀에 흠뻑 젖은 채 내게 달려와 나를 꽉 안았다.

정말 죽을 만큼 창피하면서도,
세상의 중심이 오직 우리 둘인 것 같았던 그 순간의 열기가 심장을 울렁이게 했었다.




그랬었지. 그는 그런 남자였다.

저렇게 점잖은 얼굴로 인사를 건네는 슈트 입은 사람과는 전혀 다른,
누구보다 뜨겁고 무모한 사람.

"아, 네. 오늘 사회 정말 재미있게 잘 보시던데요.
덕분에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웠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최대한 사무적인 말투, 최대한 평온한 표정.

심장은 미친 듯이 요동치지만,
지난 10년의 세월은 내게 이런 가면을 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 역시 처음 보는 사람처럼 예의 바르게 웃어 보이는 듯하다.

그러다 문득,
10년 전의 그 장난기 어린 얼굴로 그가 말한다.

"하하하. 오랜만이네. 연기가 많이 늘었는데?"

쩌적. 그의 한마디에 내 가면 위로 실금이 간다.

사회생활용 미소는 던져버린 듯하다.
놀리는 기색이 다분한, 너무도 당당한 인사.

그 한마디에 애써 눌러두었던 감정의 소용돌이가 다시 한번 휘몰아친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동생을 향해,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아, 우리 사실 대학교 때 정말 친했던 동기였어.
여기서 보니 더 반갑네."

"그러게. 여기서 이렇게 보네. 잘 지냈어?"

"그럭저럭. 난 사실 네 동생 프사 보고 미리 알고 있었어. 너인 거. 하하하."

짧고 건조해야 할 대화에, 그가 던진 뜻밖의 한 수.

그 '놀랐지?' 하는 눈빛 앞에서 나는 속수무책이다.

너의 세상에서 나는 사라졌을지 몰라도,
너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구나.

놀란 동생과 셋이 짧게 인사를 마치고 돌아설 때,
그가 악수를 청한다.

"다음에 기회 되면 밥 한번 먹자.
우리 자주 가던 파스타집 망하고 칼국수집으로 바뀌었는데, 나름 맛있더라고."

의례적인 인사말 뒤에 따라붙은,
너무나 구체적인 추억의 조각.

내가 알던 그는, 아마도 진심일 거다.

나는 마지못해 손을 내민다.

그의 따뜻하고 두툼한 손이 내 손을 감싸 쥐는 순간,
나는 숨을 멈춘다.

내 손바닥 안쪽에,
차갑고 단단한 금속의 감촉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악수를 나누고 돌아섰지만,
손바닥에 남은 차가움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나도 모르게 피식, 헛웃음을 터뜨린다.

참나.
넌 아직도, 여전히 그대로구나.

손가락에 끼는 반지는 구속이라 싫다며,
커플링은 가슴에 걸고, 손에는 결혼반지만 끼겠다고 말하던 그 신념은 확실히 지켰구나.

나를 위해 휘어진 채 자라난 나무는,
여전히 자기 멋대로 휘어진 채 꿋꿋이 살아가고 있었다.
다만 내가 아닌 다른 나무에 기댄 채.

그리고 어쩌면,
나 역시 그 휘어진 모양을 단 한 순간도 잊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손바닥에 남은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오랜만에 내 심장을 울렁거리게 한다.

스물한 살, 내 손에 반지를 끼워주던 그 시절 5월처럼.

그리고,
너의 품 안에서 얼굴이 터질 듯 부끄러웠던 여름 축제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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