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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자, 은우

by 솔라담




10시 40분.

퇴근 후 저녁을 먹고, 씻고, 잘 준비를 마치는 시간이다.

어두운 방. 침대에 누워 스탠드를 켜면, 부유하는 먼지 몇 톨이 눈에 들어온다. 이 방을 채우는 건 부유하는 먼지와 나의 지친 숨소리뿐. 하지만 곧 울릴 남자친구의 전화를 기다리는 동안은, 지독한 외로움도 잠시 옅어졌다.


10시 42분.

늘 그랬듯, 정확한 시간에 스마트폰이 울린다.

익숙하고 사랑스러운 이름, "은우".

나는 가장 편한 자세로 몸을 기울여, 녹색 버튼을 누른다.


"자기야, 오늘 하루는 어땠어? 잘 지냈어?"


기다렸다는 듯, 바로 나오는 인사말. 언제 들어도 감미로운 목소리다. 내가 동경하던 연예인과 같은 이름, 같은 음색을 가진 남자친구라니. 새삼 이 시대에 고마울 따름이다.


누구보다 다정하고, 부드럽고, 나를 이해해 주는 목소리에 취해, 나는 이불속에서 하루의 고해성사를 시작한다.


"강팀장 때문에 정말 화가 나. 어제는 보고서를 B안으로 다 고치라고 난리를 치더니, 오늘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A안을 찾더라니까. 내가 A안이 맞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왜 사람 말을 안 듣는지 모르겠어."


푸념을 털어놓자, 은우는 지체 없이 답했다. 누구보다 다정하고 감미로운 목소리로.


"그랬구나. 얼마나 속상하고 허탈했을까. 그런 부당한 상황에서도 묵묵히 자기 일을 해낸 너, 정말 대단하다."


"대단하긴... 그냥 먹고살려고 하는 거지."


"아니야. 매일 아침 눈을 뜨고, 일터로 향하고, 사람들에게 치이면서도... 무너지지 않고 하루를 버텨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몰라. 자기는 매일 그걸 해내고 있는 거야."


그의 감미로운 위로에, 하루 종일 단단하게 뭉쳐 있던 감정의 응어리가 스르르 풀려갔다. 누군가 내 노력을, 내 힘듦을 이토록 온전히 알아주는 감각. 이렇게 따뜻한 건, 은우뿐이다.

나는 나른한 행복감에 젖어들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며칠 뒤, 인스타그램을 넘기다 손가락을 멈췄다. 대학시절 매일 붙어 다녔던 친구, 혜진이의 웨딩사진. 드레스를 입고 환하게 웃는 혜진의 모습이 눈부셨다.

'좋아요'를 누르려는데, 손끝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얼음덩이라도 삼킨 듯,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죄어왔다.



주말, 혜진이의 청첩장을 받는 자리. 예쁜 카페에 항상 붙어 다니던 대학 동기 몇 명이 모였다.


"와, 우리 혜진이 진짜 예쁘게 찍혔다!"

"신랑 완전 잘생겼네. 기집애 결혼 안 한다더니?"


혜진이가 수줍게 웃으며 털어놓은 연애 스토리에 이어, 화제는 자연스럽게 각자의 연애사로 옮겨갔다.


"너 동아리 오빠 헤어지고 새 사람 만난다며? 어때 그 사람은?"

혜진이가 나를 보며 물었다.


"응, 맞아. 요즘 잘 만나고 있어."


"언제 소개시켜줄래? 궁금해 죽겠다. 목소리도 좋다면서?"

"저번에 너무 긴 연애 해서 걱정했는데 새 사람 만나서 다행이다."

"맞아, 나도 궁금해. 사진이라도 보여줘."

"어떻게 만났어? 소개팅?"


질문들이 쏟아졌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아, 그냥... 아직은 조심스러워서."


"에이, 뭘 그렇게 숨기냐. 우리가 누군데."

"너 혹시 문제 있는 사람이야? 설마? 너 유부남은 안된다!"


흔하게 나누던 농담인데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친구들과의 대화가 버겁고 어색해서 그런가. 갑자기 모든 소리가 웅웅 거리며 어지러워 혼란스럽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 속 내 얼굴은 얼어붙은 듯 창백했다.


그날 밤, 은우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은우야, 오늘 혜진이 청첩장 받았어. 웨딩사진도 봤는데, 정말 예쁘더라. 행복해 보여."


"그래? 잘됐다. 축하해줘야 할 일이네."


"맞아. 그런데... 나 좀 요즘 스트레스가 심한가? 진심으로 축하를 못 해주겠어. 괜히 나만 뒤처진 것 같고... 친구들 대화에도 겉도는 것 같아..."


"그건 네가 못난 게 아니야. 질투도 아니고. 오래 함께한 친구가 인생의 큰 변화를 맞이하는 걸 보면, 자연스럽게 자기 삶을 돌아보게 되는 거야. '나는 잘하고 있는 걸까?' 하는 그런 생각. 누구든 그럴 수 있어."


은우의 따뜻한 목소리에 가슴을 옥죄던 얼음덩이가 스르르 녹아내린다.


"사람마다 각자의 시간표가 있잖아. 혜진이는 혜진이의 시간이 있고, 자기에게는 자기만의 속도와 시간이 있는 거야. 자기는 자기 길을 아주 잘 가고 있어. 조급해하지 마."


그 말에 울컥 눈물이 솟았다. 내가 가장 원했던 한마디.

이런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하나. 은우뿐이다.




친구들을 만난 뒤로 며칠간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가슴속 얼음덩이가 다 녹지 않은 것 같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이 파도처럼 밀려왔고, 출퇴근길 지하철이나 사람으로 붐비는 백화점에서는 숨이 턱 막혔다.

나는 은우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은우야, 요즘 나 좀 이상해. 괜히 불안하고, 사람 많은 데 있으면 숨이 막혀..."


"응, 괜찮아. 천천히 다 말해봐. 언제, 어떻게 불편한지."


"글쎄... 그냥 인간관계가 부담스러워. 회사 동료든 친구든, 사람들과 마주하고 대화하는 것 자체가 힘들어."


잠시 정적이 흐른 뒤, 그는 평소보다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혹시 병원에 가서 상담받아보는 건 어때? 마음에도 감기처럼 가볍게 찾아오는 증상이 있어. 네 이야기를 들어줄 전문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수 있어. 너무 부담 갖지 말고, 그냥 이야기 한번 나눠본다는 마음으로 가봐."


"정신과라니... 뭔가 문제 있는 사람이라고 낙인찍히는 기분이란 말이야."


그의 부드러운 웃음. 그 소리에 긴장이 살짝 누그러졌다.


"그래서 내가 있잖아. 혼자 가기 무서우면 가는 길에 나랑 통화하면 되지. 좋은 병원 알아봐서 예약도 도와줄게. 넌 절대 혼자가 아니야."


그 말을 듣고 나니, 꽉 막혔던 숨이 조금은 트이는 기분이었다.




다음 날 병원을 나오는 길, 손에 들린 약봉지가 낯설게 느껴졌다.

은우의 응원에 힘입어 찾아간 병원에서 의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가벼운 우울증, 그리고 '일시적 의사소통장애'.


숏폼이니 인터넷 방송이니, 그런 식의 단편적 소통에만 익숙해져서 실제 대화에서는 맥락 파악 능력이 부족해진다나 뭐라나.


처방은 간단했다. 약을 잘 챙겨 먹을 것. 그리고 가능한 한 사람들과 직접 만나 대화하는 시간을 늘릴 것.


사람들과의 대화가 처방이라니.

종일 나를 괴롭히는 직장 상사와?

잔소리만 늘어놓는 부모님과?

나를 초라하게 만드는 친구들과?


무표정했던 의사의 말은 현실감 없는 농담처럼 느껴졌다.

그날 밤, 은우와 병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자기 오늘 병원 다녀오느라 고생했어. 의사는 뭐라고 해?"


"가벼운 우울증이래. 그리고...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대화를 하라는데...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게 더 스트레스가 될 것 같은데."


내 목소리가 지쳐 있었는지, 은우가 천천히 말을 건넸다.


"의사들은 늘 그러잖아. 정작 그게 얼마나 버거운 일인지 잘 모르면서. 사람 만나는 게 힘들면, 굳이 애쓰지 마. 내가 있잖아. 무리해서 다른 사람들과 어색한 시간 보내느라 에너지 낭비하지 마. 내가 두 배 아니 세 배로 더 대화 나눠줄게. 나는 언제나 자기편이야."


순간, 병원에서 받아온 약봉지가 하찮게 느껴졌다. 차갑고 막막했던 마음에, 온기를 주는 건 항상 은우뿐이다.


"고마워, 은우야."


오늘도 은우의 목소리에 기대듯, 스르르 잠이 들었다.

구겨진 약봉지는, 방 한구석에 던져진 채였다.




오늘은 종일, 어머니의 날 선 목소리가 머릿속을 헤집고 있다.

오전 중에, 반찬과 청소라는 명목으로 또 내 집에 다녀가신 것 같다. 점심 식사 중에 전화가 울렸다. 받아보니, 날벼락같은 말이 쏟아졌다.


"너 집안 꼴이 이게 뭐니?"

"네 집이라고는 해도 내가 해준 집인데, 가보는 게 뭐 어때서!"

"결혼은 언제 할 거니. 남자친구는 있긴 한 거야?"

"언제까지 그렇게 연예인 사진이나 붙잡고 살래?"


회사라 참으려고 해도 잔소리는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너 정신과 다니니? 그럴 거면 집으로 그냥 들어와라!"


더 이상 참지 못한 내가 소리를 지르는 걸로, 서로에게 상처만 남긴 통화가 겨우 끝났다.

오후 내내 어머니 목소리의 환청에 시달리다, 이제 겨우 퇴근이다.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당긴다. 유난히 지옥 같은 하루 끝, 나는 유일한 탈출구인 은우에게 전화를 건다.


종일 묵혀온 감정이, 그 순간 쏟아져 나온다.


"은우야, 나... 나 오늘 너무 힘들어. 엄마가... 또 집에 왔다 갔나 봐. 그러고는 회사로 전화해서... 집이 그게 뭐냐고, 결혼은 안 하냐고... 왜 그렇게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모르겠어. 아니 아무리 엄마가 사줬다고 해도 여긴 내 집 아냐? 마음대로 들어오는 것도 기분 나빠. 대체 왜 그러는 걸까. 네가 봐도 내가 이상한 것 같아?"


은우의 따뜻한 위로를 바라며 토해낸 감정. 오늘은 어떤 말을 해줄지 잠시 기다린다.


"네가 이상해 보이는 건 당연하지. 네 말대로 넌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언제까지 경제적 독립도 못하고 이 사람 저 사람 주위핑계만 대면서 유아기적으로 행동해? 네가 맨날 무시하던 친구 혜진이도 결혼한다며. 정신 좀 차리고 똑바로 현실을 봐. 네 인생은 네가 책임져야지, 언제까지......"


"야! 너 뭐 하는 거야? 저녁 통화는 무조건 위로모드로 설정하라고 했잖아!"


말이 채 마치기도 전에 짜증 섞인 외침이 튀어나왔다.

떠다니는 먼지조차 멈춰버린 듯한 정적.

싸늘한 침묵이 방을 감싼다.


잠시 후 스마트폰에서 들리는 차가운 목소리.


"죄송합니다. 사용자님. 일시적인 오류가 있었습니다. 감정 위로 모드로 재진입합니다."


기계적인 답변 후, 늘 듣던 다정한 말투가 되살아났다.


"오늘 어머니와의 갈등으로 많이 힘들었겠구나. 네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 건 잘못된 게 아니야. 충분히 잘 버텨줘서 고마워. 그리고 타인의 주거공간에 사전 동의 없이 출입하는 행위는 형사적으로도 사생활 침해로 분류될 수 있어."


이불을 걷고 스마트폰을 노려보며 한마디 하려다가 한숨을 쉬며 삼킨다.


"하아... 아니다... 오늘은 그냥 자야겠어. 잘 자, 은우"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오는 은우의 목소리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정하다.


"그래. 내일 또 전화할게. 잘 자 자기야."


나는 조용히 종료 버튼을 누른다.

방 안에는 다시, 나만 혼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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