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신지요.
어느새 눈이 녹고 희망이 돋는 봄이 되었습니다. 아가씨께서도 언제나처럼 잘 지내시는지요.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나무의 겨울눈처럼, 개구리의 굳은 몸처럼, 저 또한 겨우내 움츠러들었던 몸과 마음이 겨우 움트는 기분입니다.
저는 지금 안양에 있습니다. 아가씨와 그리 멀지 않은 곳이네요. 그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저도 이곳에 와서 알게 된 사실인데, 안양의 뜻은 '극락정토'라고 합니다. 극락정토. 괴로움 없이 지극히 안락하고 자유로운 세상이라니. 마치 이 봄처럼 따뜻한 세상 아닐까요.
지난해는 우리 모두에게 힘든 시기였습니다. 뉴스에 나온 대로, 상상도 못 한 상실. 너무 많은 이를 슬픔에 빠뜨린 그 비극에 아가씨께서 얼마나 상심하셨을지. 저도 참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부디 남은 모두가 괴로움 없이 안락했으면 합니다.
어제 읽은 책에 '부극반태'라는 사자성어가 나왔습니다. 불운이 절정에 달하면 행운이 찾아온다는 말이더군요. 저와 아가씨의 올 한 해는 작년의 불운을 딛고 행운이 가득하길 희망하며 펜을 내려놓겠습니다. 부디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3.23.
괴로움 없이 안락하다는 곳에서 올림.
P.S. 꽃샘추위가 기승입니다. 꽃 같은 옥체 보중하시길.
안녕하신지요.
이른 무더위가 기승입니다. 장마까지 겹쳐서 건강 잃기 쉬운 계절이네요. 저는 거처까지 옮기다 보니 여름감기를 가볍게 앓았었습니다. 아가씨께서는 건강히 잘 지내시는지요. 두 달 전 뵈었던 아가씨는 건강해 보이셔서 참 다행이었습니다.
다만 검은 옷 때문일지, 표정에는 깊은 수심이 가득하셔서 제 마음도 닻처럼 가라앉았습니다. 사실 그곳의 모두가 큰 슬픔에 빠져 계셨죠. 인사를 드릴 때 크게 오열하시던 분들도 기억납니다. 이해합니다. 크나큰 상실을 겪은 분들이니 말입니다. 부디 이젠 안녕을 찾으시길,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맞습니다. 그날, 아가씨의 목에 걸린 십자가가 제 가슴속 깊이 들어왔습니다. 그날 저녁부터, 전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극락정토라는 이름의 안양을 떠나게 된 것도 주님의 인도이셨을까요?
어제는 목사님께서 마태복음의 한 구절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나는 과연 일곱 번은커녕 단 한 번이라도 용서하는 삶을 살았던가. 나는 남들을 용서하지 않고, 왜 남에게서는 관용만 바랐던가. 앞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는 삶을 살지어다. 이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아가씨의 삶에도 부디 용서와 평안이 가득하길 기도드리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7.7.
푸른 소나무 숲에서 올림.
P.S. 일곱 번의 용서가 왜 유독 떠올랐나 했더니 날짜 때문인가 보네요. 까막까치 다리 건너 다시 만나는 날이 오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안녕하신지요.
어느새 결실의 계절 가을입니다. 무르익은 한 해의 결실을 수확하는 풍족한 시기네요. 아가씨께서도 올 한 해 뿌린 씨앗들이 훌륭한 결실을 맺으셨길 바랍니다.
이번 추석, 저는 몸도 마음도 풍족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작년 이맘때는 땅이 얼어붙기 전에 일을 마치려다 보니, 추석이 지나가는 것도 모를 정도로 정신없었습니다. 그에 비해 올해는 여러 곳에서 따뜻한 손길이 닿아, 생각지도 못한 넉넉한 명절을 보냈습니다. 함께 나누고,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아가씨 덕분일까요, 추석의 풍족함 덕분일까요. 요즘 제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평안하답니다. 요즘 매일같이 제가 되뇌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주님께선 그 찬란한 이름으로 저의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스스로를 희생하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
작년, 먼저 떠나신 분들 또한 영원한 안식과 찬양을 누리고 계시겠죠. 주님께 귀의한 입장에서 차례상이라는 게 편하지만은 않았지만, 그분들도 풍족할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습니다.
아가씨께서도 이 가을만큼 풍족한 마음으로, 용서받는 매일이 되시길 기도드리겠습니다.
10.2.
가을에도 변함없이 푸른 소나무 숲에서.
P.S. 이곳은 사과가 맛이 좋아 유명하더군요. 아가씨께 전해드릴 수 없어 아쉽습니다.
안녕하신지요.
이곳은 이미 여러 차례 눈이 내렸답니다. 세상을 덮은 흰 눈을 보면, 마치 제 마음까지 하얗게 정화되는 기분입니다. 창밖을 보면 마치 크리스마스트리 속에서 살아가는 느낌입니다. 트리 장식에 소나무를 사용하는 것은, 늘 푸르른 영원성 때문이라더군요. 저도 아가씨도 주님 곁에서 영생을 살아갈 것이라 생각하니, 언제 끝날지 모를 이 생활도 버틸 만합니다.
며칠 전에는 간수가 아가씨께 편지를 그만 보내라고 하더군요. 아가씨의 부탁이 있었다고. 그런 거짓을 말하는 간수를 도무지 두고 볼 수 없어서, 법무부에 민원 편지를 수도 없이 보내고 고소도 진행 중입니다. 덕분에 담당 간수가 바뀌고 제 생활도 약간 편해진 느낌입니다. 이것도 다 아가씨 덕분이겠죠.
어제 신문에 나온 제 기사를 보셨나요? '사상 최악의 연쇄살인범'이야 그렇다 쳐도, '절대 용서받지 못할 자'라는 말에는 코웃음이 나왔습니다. 이미 전 죄 사함을 받았는데 누가 누구를 용서한단 걸까요. 이제 제가 그 어리석은 자들을 위해 기도를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아가씨께서 미망인이 된 것도, 법정에서 우리가 만난 것도 모두 주님의 은총이겠지요. 이 편지도 부디 아가씨에게 닿길 바랍니다.
12.19.
눈 덮인 청송에서.
P.S. 친구 말로는, 이사를 가셨다던데... 제가 전해 들은 이 주소가 맞길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