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축배

by 솔라담


세상엔 별의별 일이 다 있다지만, 몇 년 전의 이변은 상상을 초월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심지어 월드컵 우승 기사조차 1면을 차지하지 못했을 정도였으니...

동물들이 말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안다. 말이 안 된다는 것을. 동물들은 발성을 위한 기관도 없고 언어를 구성할 지식도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어쩌랴. 실제로 벌어진 일인 것을.




시작은 한 연구소의 고릴라였다. '마마 코코'. 그녀는 동물의 언어 능력을 실험하기 위한 실험체였고, 단어 카드를 조합해 간단한 문장을 만들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굵은 목소리로 그 단어를 직접 내뱉은 순간, 담당 과학자가 놀라 기절한 것은 이젠 널리 알려진 일화다.

지구의 모든 동물. 아니, 정확히는 지상의 척추동물들이 말을 하게 되기까진 두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인류의 과학자들은 이 대사건의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총동원되었다. 머지않아 폐호흡이 언어능력의 최소 조건이라는 것, 그리고 성대가 없는 동물들도 각자의 기관으로 발성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발성 메커니즘이야 해부학적 연구로 어느 정도 규명되었다지만, 순식간에 언어가 가능할 정도로의 지적 진화는 과학자들에게 진정한 난제였다. 대뇌피질에 어느 순간 변형이 왔다는 사실과 그로 인해 지능이 비약적으로 높아졌다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 가설이 가장 유력할 뿐이다.

아, 어떻게 동물들이 서식하던 지역의 언어를 하게 됐는지는 연구조차 되고 있지 않다. 뭐, 정확히는 못 하게 된 거지만.

돌이켜 보면 이 사태 초반에는 동물과 인간의 진정한 조화가 올 것이라는 핑크빛 기류가 돌았었다. 실제로 수많은 동물학자들은 오랫동안 미궁에 빠져 있던 비밀들을 속속 밝혀냈고, 멸종 위기의 동물들도 개체 수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동물들과의 조화를 두고 종교계도 떠들썩했다. 한 번은 동물의 영혼을 주제로 TV 토론이 매우 격렬하게 불타올랐는데, '그러게, 애초에 살생을 하지 말았어야죠.'라며 미소 짓던 스님의 발언이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당연하겠지만, 갈등의 시작은 도축이었다. 곳곳에서 인간과 소통이 가능한 지성체를 희생시키면 안 된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를 등에 업은 NGO들은 대규모 집회를 열기 시작했고, 이에 질세라 기업화된 거대 축산업체들은 정계와 언론에 전방위적 로비를 퍼부으며 반격에 나섰다. 여기에 '율법'을 내세운 일부 종교가 축산업체의 편에 서고, 살생을 반대하는 다른 종교들은 맞불 집회를 열며 종교 간 대립의 골도 깊어갔다.




'탕!'
훗날 '시작의 한 발'로 불리게 된 총성. 공장형 도축장의 경비원이, 과열된 시위대에 겁을 먹고 실수로 발포한 그 한 발. 언제나처럼 전쟁은 한 발의 총성으로 시작되었다. 분노한 시위대는 도축장 직원들과 그곳을 지키던 종교인들을 거세게 덮쳤고, 현장은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축산업이 기간산업이던 해당 국가는 비상계엄을 선포하며 강력한 대응을 했고, 무차별적 진압은 국경을 넘어 인접 국가의 국민들까지 희생시키고 말았다. 국경 문제로 갈등이 깊던 이웃국가도 즉각 국경에 군대를 투입했고, 전쟁의 불씨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결국 종교와 이념, 그리고 군사동맹 등의 이유로 순식간에 수많은 나라가 뒤엉켜 참전하며 인류는 '3차 대전'이라는 공포에 휩싸였다.

어떻게 보면 다행일 수도 있을까? 인간끼리의 전쟁은 동물들의 참전으로 막을 내릴 수 있었다. 전쟁이 길어지자 인간들은 병사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말을 알아듣는 동물들을 총알받이로 내몰기 시작했다. 전쟁의 도구로 희생되던 동물들이 절망에 빠질 무렵. '마마 코코'를 중심으로 한 저항군이 등장했고, 수많은 동물들은 하나의 거대조직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동물 저항군은 비록 전투기나 탱크를 사용할 순 없었다. 하지만 레이더에 걸리지 않는 새와 박쥐들, 그리고 지하 어디든 잠입이 가능한 설치류를 이용해 소형 폭탄 단 하나로 대통령과 국가원수 등의 요인을 핀포인트로 제거해 나가기 시작했다.

지휘체계의 부재로 인간의 군대는 크게 무력해졌고, 행정수장을 잃은 국가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인간사회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다름 아닌 광견병이었다.

어느새 우리는 인간 문명의 마지막 보루만 남기고 모든 곳을 점령했다. 그리고 오늘이 마지막 총공세의 날이다. 물론 우리 사이에도 식육목을 중심으로 인간과의 공존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다만 식용으로 사용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과 비용이 들어간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고, 무엇보다 수적 다수를 차지하는 우제류들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멸절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다. 나도 오늘은 발효된 과일을 한 봉지 사 왔다. 이런 날은 기념을 해야 마땅하지.

자. 사라질 인간을 위하여!

keyword
일요일 연재
이전 13화아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