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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해, 미안해.

by 솔라담



새 학교. 새 교실. 새 친구들.
중학교 1학년, 봄의 교실은 기대와 불안이 뒤섞인 낯선 공기로 가득했다.
하지만 갓 이사 온 내게 그 공기는 유독 무겁고 차가웠다.
초등학교 동창인지 이미 친해진 몇몇,
눈빛만으로 가까워진 몇몇.
작은 무리를 이룬 아이들 사이에서,
나처럼 남겨진 아이들은 눈치만 살피며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자, 첫 자리 배치는 제비 뽑기로 할게."

선생님의 말 한마디에 얼어붙었던 분위기가 술렁였다.
웃는 아이들, 어색해하는 아이들, 그리고 나처럼 긴장한 아이들.
내 이름은 거의 마지막 즈음에 불렸다.

자리에 앉아 옆을 보니, 고개를 푹 숙인 아이가 조용히 노트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
어찌나 존재감이 옅은지, 마치 낮에 켠 형광등 같았다.
인사도 눈 맞춤도 없었다.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나와 비슷한 것 같아서.



2주쯤 지났을까. 다들 방과 후 약속 잡느라 바빠졌을 무렵,
멀리서 이사 온 나는 여전히 혼자였다.
교실 속 수많은 섬 중에서, 나만 다리 하나 놓이지 않은 섬이었다.
아, 나만은 아니었다. 옆자리 아이도 마찬가지.
다만, 그 애는 스스로 모든 다리를 거부하는 고요한 외딴섬 같았다.
여전히 연필 소리만 사각거리는 외딴섬.

무심코 곁눈질한 노트의 그림에 깜짝 놀랐다.
좋아하면서도 부끄러워, 누구에게도 말 못 했던 캐릭터라서? 아니면 너무 잘 그려서?
나도 모르게 말을 꺼냈다.
"어, 너 이거... 어떻게 알아?"

자신에게 남이 말을 걸 줄 꿈에도 몰랐다는 듯, 동그랗게 커진 토끼눈이 귀여웠다.
"나? 아니, 얘? 너 얘 알아?"

"어. 나도 완전 팬인데..."
그렇게 말문이 트이고 나서야 알았다. 이렇게 말이 많은 아이였구나. 그리고 나도 꽤 오타쿠였구나. 이렇게 잘 통할 줄이야.
어느새, 새하얀 노트는 우리가 좋아하는 주인공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우리의 방과 후는 텅 비어 있었다.
학원도, 기다리는 부모도 없던 그 시간을
우리는 조금씩, 서로의 존재로 채워가기 시작했다.

학교 근처, 버려진 지 오래된 공터가 있었다.
오래된 그네와 녹슨 철봉만 덩그러니 남은 그곳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듯했고,
자연스럽게 우리의 조용한 아지트가 되었다.
나란히 그네를 타고, 벤치에 앉아 만화를 그리고,
편의점에서 사 온 컵라면을 나눠 먹으며
우리의 일상은 점점 닮아갔다.

여느 때처럼 공터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던 어느 날,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했다.
열심히 그리던 그림 위로 한 방울씩 툭. 툭. 빗물이 번졌다.
젖어가는 노트를 가방에 급히 넣으며 허둥대다가,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지... 너희 집, 가도 돼?"
아이는 잠시 놀란 듯 나를 쳐다보더니,
한참 망설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의 집은 의외로, 꽤 번듯한 주택가에 있었다.
"우와."
놀라워하는 내 손을 이끈 곳은 대문이 아니었다.
아이는 옆으로 돌아, 계단 밑 좁은 쪽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나타난 작고 눅눅한 단칸방.
낮은 천장, 빛바랜 커튼, 퀴퀴한 냄새.
방 한편, 매트리스 위엔 몸이 불편해 보이는 할머니가 누워 계셨다.
아이는 익숙하게 내 손을 이끌었다.
그 문턱을 넘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아... 그래서 집으로 부르지 않았구나.
습기 때문일까. 가슴이 먹먹했다.

"미안해. 집이 조금 불편하지."

뭐가 미안한 걸까.
괜찮다고 말하려 했는데, 목소리가 안 나온다.

"아니, 아니... 내가... 내가..."

말을 채 맺지도 못하고, 우리는 서로를 껴안고
한참을 그냥 울었다.

그날, 우리는 묵혀둔 서로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의 어머니는 긴 병을 앓으시다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자리를 비운 지 오래라
지금은 아프신 할머니와 단둘이 산다고 했다.
내 머릿속에 '교도소'라는 단어가 잠깐 스쳤지만,
더 묻진 않았다.

사실, 그건 내 이야기니까.
우리 집은 술에 절어 살던 아버지의 폭력 끝에
결국 이혼했고,
할머니 집이 있는 이곳으로 도망치듯 이사 온 거다.

아이는 내 이야기를 듣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너는 엄마랑 같이 살아서 좋겠다."

그 말은 내 마음 깊고 부끄러운 곳을 조용히 간질였다. 미안함과 동시에,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
무엇이었을까? 그 알 수 없는 감정은 내 등 뒤에 조용히 자리 잡았다.




어느새 둘만의 1학년이 끝나고, 2학년.
아쉽게도 우리는 다른 반이 되었다.

동네에 제법 익숙해진 나는,
생각보다 쉽게 새로운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어느 날 점심시간.
새 친구들과 복도 창가에 기대서 아이돌 노래를 따라 부르며 웃고 있는데, 그 아이가 다가왔다.

"어, 왔어? 얘들아, 여긴 1학년 때 내 친구."

나는 짧게 소개했고, 나중에 보자며 아이를 돌려보냈다.

"뭐야, 너 쟤랑 친해? 쟤 옥수수잖아.
나 쟤랑 같은 초등학교였는데, 쟤네 할머니 육교 밑에서 옥수수 팔거든."

순간,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냥... 엄마가 놀아주라고 해서."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지만, 왠지 얼굴이 뜨거워졌다.
나도 모르게 그 아이가 내려간 건 맞는지 몇 번이나 계단 쪽을 힐끗거렸다.




장마 무렵.

습기 때문에 힘들던, 학부모 참관일 전날 밤이었다.
집에 돌아오니, 엄마는 예쁘게 차려입은 채 술에 취해 있었다. 어디를 다녀온 걸까.
식탁 위의 술병을 보는 순간,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아빠 생각이 스쳐서일까.

"우리 딸... 엄마가 너 사랑하는 거 알지?
그런데... 나도 다시 결혼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왜 이렇게 힘들지, 나는..."

기운 없이 축 늘어진 엄마의 푸념.
왠지 미안해서 안아주고, 위로해주고 싶었다.
아마 본인도 모르게 덧붙인 '너만 없었으면'을 듣기 전까지는...

세상이 무너지는 게 어떤 건지, 그날 처음 알았다.
얼마나 울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음 날, 참관수업.
퉁퉁 부은 눈을 들킬까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다행히 수업을 잘 마치고 귀갓길, 복도에서 마주친 그 아이는 혼자였다.
할머니께서는 편찮으신지 못 오신 모양이다.
아이는 우리 엄마와 나란히 선 나를 보며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너희 엄마 정말 예쁘시다."

나는 어색하게 고맙다고 답했다. 그 아이의 구김 없는 웃음이 너무 밝아서였을까. 내 등 뒤엔 비겁한 그림자가 끈적하게 들러붙었다. '그래도 내가 얘보단 낫지'라는 감정의 그림자가.




맴— 맴—
유독 더위가 심하던 초여름날. 아이가 숨을 헐떡이며 내게 달려왔다.

"아빠가 돌아오신대!"

땀을 닦으며 헐떡이면서도, 싱그럽게 외쳤다.
햇살을 삼킨 듯한 얼굴. 나는 웃으며 말했다.

"정말? 진짜 잘됐다! 축하해."

진심이었다.
그런데 가슴이 턱, 막혔다.
왜였을까.
술병을 들고 고함을 치던, 비틀거리던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서였을까.
'아빠'라는 단어가, 이상할 정도로 낯설게 들렸다.

그 후로 며칠 동안, 아이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 주말, 시내에서 정말 우연히 그 애를 보았다.

단정한 옷차림의 낯선 남자 손을 잡고, 해맑게 웃고 있었다.
다정하게 손을 맞잡고, 눈을 맞추는 부녀.
내가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장면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 모습은 이상할 정도로 완벽해 보였다.
다음 날,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 사람, 너희 아빠야?"

"응. 엄마 병원비로 빚을 많이 져서 아빠가 그거 갚으려고 원양어선을 타셨는데, 이번에 다 갚고 돌아오셨어. 우리 이제 같이 살아."

"진짜 잘됐다. 축하해!"

돌아서는데 등 뒤가 끈적인다.
더위 때문인지, 그림자 때문인지...




며칠 뒤, 아이의 집에서 저녁을 먹게 되었다.
그날은 눅눅한 반지하가 아니었다.
햇살이 가득한 아파트, 꽃무늬 벽지, 서늘할 정도의 에어컨 바람.
할머니는 몰라보게 건강해 보였고, 아이는 부쩍 더 밝아져 있었다.
오랜 선원 생활로 그을린 피부의 아버지는,
친하게 지내줘서 고맙다며 내게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밥을 먹는 내내 밥알이 씹히지 않았다.
등이 쿡쿡, 쑤셨다.

그날 이후, 나도 모르게 아이의 연락을 피하기 시작했다.

'내가 뭐 잘못했어? 미안해...'
몇 번이나 온 메시지에, 나는 아무 답도 하지 못했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어, 안녕. 내가 연락할게."
짧은 인사만 남기고 자리를 떴다.

왜 그랬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진심으로 축하해줘야 할 일인데.
왜 나는 그 행복한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을까.

난 뭐가 두려웠던 걸까.




몇 달 뒤, 방 청소를 하다 낡은 노트를 발견했다.

책상 서랍 가장 깊숙한 곳에 숨어 있었다.
친구가 빌려준 노트였다.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를 그려주며, 그리는 법을 알려주겠다고 했던.
어찌나 자세히 적어줬는지, 따라 하기도 버거웠던 기억이 난다.

2학년이 된 뒤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오랜만에 맡는 종이 냄새 속 익숙한 낙서들.

'국어쌤 졸짱남', '오늘도 라면고?', '항상 고마워'.

서로에게 남긴 짧은 메모들로 가득했다.
한 장, 한 장.
넘기던 손이 어느 페이지에서 멈췄다.
우리가 가장 좋아했던 캐릭터들.

서로의 말풍선 안에,
또박또박 눌러쓴 글씨가 보였다.

"너 나중에 웹툰작가로 성공해도 나 잊지 마.
그럼 나 꼭 스토리 작가 시켜주라ㅋㅋ"

"고마워. 정말 고마워. 내년에도 우리 친하게 지내자!"

나는 노트를 든 채, 오래도록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노트 위로 번지는 얼룩을, 그저 하염없이 손가락으로 닦아낼 뿐이었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축하해. 진심이야... 근데 지금은, 그냥...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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