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청소를 해야겠다. 바쁘다, 힘들다, 피곤하다... 이런저런 핑계로 미뤄둔 게 며칠째인지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어질러져서 그럴까. 집에 있는 시간에는 한숨만 늘어났다. 창문 너머로 스며드는 겨울 햇살이 탁자 위를 비추자, 그 위에 쌓인 시간의 흔적들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오늘은 정말 깨끗하게 치워보자고 마음을 다잡고, 낮에 사 온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펼친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린다.
어느새 두텁게 쌓여버린 옷 무더기부터 정리를 시작한다. 중간중간 섞여 있던 네 옷가지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그렇게 구분 좀 해달라고 했는데... 처음엔 분명 내가 혼났던 기억이다. 옷 정리 안 한다고. 그러던 네가 아무렇지 않게 내 셔츠나 추리닝을 같이 입기 시작하더니, 언제부터인가 완전히 경계가 사라져 버렸다.
입장이 바뀌어, 옷 정리 좀 잘해달라는 내게 오히려 쪼잔하다고 몰아붙이던 네가 어찌나 웃기던지... 내가 아끼던 회색 후드티가 손에 잡힌다. 엄마가 선물해 준 옷인데 어느새 소매 끝이 잔뜩 늘어나 있다. 긴장할 때마다 소매에 양팔을 욱여넣던 네 버릇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망가뜨린 내 옷이 한 무더기구나. 그래도 어느새 내 옷들에 배어든 네 향기에 슬쩍 웃음이 난다.
화장실 청소도 만만치 않다. 분명 자주 하는 것 같은데도, 배수구에는 누군가 마법을 부린 듯 머리카락이 엉켜 있다. 머리카락의 길이로 보아 네 것임이 분명한데, 왜 내 정수리 탓을 하는지 모르겠다. 휑해진 것도 짜증 나는데. 솔직히 네 앞에선 웃었지만 뒤돌아서 머리를 만지며 한숨을 내뱉곤 했다.
세면대 위의 칫솔은 네 개. 내 것은 분명 파란색 하나뿐인데, 넌 대체 왜 칫솔을 세 개나 꺼내둔 걸까? '내 칫솔 어디 갔어?'란 네 말에 겨우 싱크대에서 찾아줬더니 이미 새것을 뜯어 이를 닦고 나오던 너. 아마도 그 급한 성격 때문이겠지.
부엌 서랍장에도 네 짐만 한가득이다. 나도 그렇지만, 너도 정말 정리를 못하는구나. 그런 둘이 만났으니, 이만큼 어질러지는 것은 당연하겠지. 종류별로 모아둔 참치캔들. 그중 몇 개는 이미 유통기한이 지나버렸다. 유통기한이 지난 통조림이라니... 우리가 처음 장을 본 기념이라며 네가 아끼던 것들이다. 먹을 수 있을까 싶어 들어보니 왠지 묵직하다. 시간의 무게가 쌓인 걸까.
만년은 너무 길다고, 우리 사랑의 유통기한은 천년으로 하자며 웃던 네 얼굴이 떠오른다. 저녁에는 오랜만에 중경삼림을 봐야지. 남은 팝콘이 생각나서 열어본 서랍에는, 처방만 받고 먹지 않은 네 감기약이 약봉투째 쌓여 있다. 아니, 약은 챙겨 먹지도 않으면서, 조금만 아프면 병원은 또 잘 가는 네가 웃겨서 피식 웃음이 난다.
쓰레기봉투에 칫솔 세 개와 유통기한이 지난 통조림을 넣는다. 하나씩 넣을 때마다 부스럭거리며 삼키는 봉투 소리가 이상하게 거슬린다. 옷가지들도 하나씩 개어 집어넣는데 손이 자꾸만 멈춘다. 겨울옷은 왜 죄다 두고 간 건지. 두꺼운 니트며 커플로 맞춘 벙어리장갑까지. 지금 넌 춥진 않을까. 올겨울은 유독 춥던데...
찬바람만 마시면 콜록거리며 기침을 하던 네 모습이 떠오른다. 그럴 때면 내 목도리를 풀어 둘이 같이 둘렀었다. 좁은 목도리 안에서 서로의 손을 잡고 걷던 그 밤거리가 생각난다. 붕어빵 냄새가 나던 버스 정류장 앞에서 나누던 네 온기가 아직도 생생하다.
혹시 지금도 약은 안 먹고 아픈 걸 참고 있진 않을까. 또 아픈데도 초라하게 홀로 앉아 참치캔에 햇반만 먹고 있진 않을까... 열이 나도 "괜찮아, 금방 나을 거야"라며 그냥 꼭 안아달라던 너. 아플 땐 유독 외로워했었는데. 즐겨 입던 니트는 왜 놓고 갔을까. 괜히 콜록거리던 모습이 떠올라 고개를 떨군다. 니트에 얼굴을 묻고 있으니, 네 향이 더 짙어진다. 축축해져서 그런가... 괜히 어깨가 떨린다. 그냥, 오늘 청소가 어지간히 힘들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