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 난 어쩌라고 이 새끼야!"
단골 술집 한구석에 앉아, 날 질책하는 오랜 친구.
"미안해. 내가 생각이 너무 짧았다."
다 큰 녀석의 울음 섞인 한탄에, 난 사과 말고는 할 말이 없다. 낡은 테이블 위엔 소주병이 쌓여있다. 두 병, 세 병, 네 병. 평소에는 두 병도 채 못 먹는 녀석인데... 녀석이 지긋지긋해하던 오돌뼈는, 나온 모습 그대로 테이블 위에서 식어가고 있다.
"우리가 같이 지낸 게 이십 년이야. 기억도 잘 안 나는 어린 시절부터 같이 자랐다고. 내가 너한테 뭐 숨기던 거라도 있었냐? 넌 대체 왜 그랬는데. 왜 나한테 말도 안 한 거냐고!"
갈라진 목소리. 충혈된 눈. 항상 단정하던 머리칼은 헝클어져있다.
"너 부모님 생각은 안 하냐? 내가 네 부모님 뵐 낯이 없어!"
"정말 미안해. 부모님께는 이제 내가 가볼게. 나도 널..."
"진짜 어떻게 그럴 수 있냐! 말이라도 했어야지! 나한테 말이라도 했어야지!!!"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 듯, 거칠게 울분을 토해낸 녀석. 큰 숨을 한번 내뱉더니, 이내 엎드려 어깨만 들썩인다. 곰 같은 덩치로.
녀석의 말은 한마디도 틀리지 않았다.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 무거운 질책에 도무지 고개를 들 수 없어서, 발치만 쳐다본다. 발 옆의 농구공만 한 검은 실뭉텅이. 할 말이 없어 핑계 삼아 그것만 쳐다본다.
누구보다 순하지만, 큰 덩치 때문에 오해도 많이 산 녀석. 초등학교 3학년 때, 선배들에게 괴롭힘 당하던 날 도와준 게 첫 만남이었다. 정확히는 같이 두드려 맞았을 뿐이었지만. 부르지도 않은 우리 할머니 장례식장에 찾아와 나보다 더 퉁퉁 부은 눈으로 돌아간 녀석. 어릴 때 짜파게티 몇 번 얻어먹은 게 뭐가 그리 고마웠다고...
내 일병 시절. 실연으로 힘들어할 때, 주말마다 먼 길을 달려와준 것도 소중한 기억이다. 그러다가 자기 여자친구한테도 차이고, 나도 주말마다 일은 안 하고 놀러 나간다고 오히려 혼나기만 했었지. 그래서 오지 말라고 해도 굳이 꾸준히 와주던 녀석. 돌이켜보면 난 이놈한테 받기만 했구나. 아무것도 해주진 못하고.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술 너무 많이 먹지 말고. 건강 챙기고. 먼저 가볼게."
내 말이 안 들리는 걸까, 아니면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걸까. 산만한 덩치 밑으로 끅끅 거리는 소리만 겨우 들린다. 좀 더 옆에 있어줘야겠지만, 시간이 없어 먼저 자리를 뜬다. 이렇게 남겨두고 떠나려니 위장이 뒤틀리는 듯 하지만, 눈물은 나지 않는다.
검은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부모님 댁이다. 바쁘단 핑계로 어지간히 오지 않았었는지, 근처 풍경이 낯설다. 문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 들어가서, 부모님이 앉아 계신 식탁 맞은편에 자리한다.
"아가. 우리한테 말이라도 했어야지. 이 어미한테 못할 말이 어디 있다고..."
어머니의 멍한 시선은 어디를 보시는 걸까. 자상한 목소리가 폐부를 쑤신다.
"그나저나 우리 그 돈은 어떻게 해야 하나. 그거 구한다고 얼마나 뛰어다녔는데..."
"아니 당신도 돈! 돈! 돈! 그 소리 좀 그만해요. 애 마음 모르는 것도 아니고!"
"황망해서 그러지 나도. 하루 만에 다 날렸잖아. 겨우 빌린 돈을 말이야... 에휴, 왜 그런 선택을..."
아버지의 말씀에 난 또 발치만. 검은 실뭉텅이만 바라본다.
빌어먹을 전세사기.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놈들. 보증보험도 요건이 안 돼서, 이사를 위해 급히 손을 벌릴 곳은 부모님 밖에 없었다. 두 분께선 주위에 고개 숙여가며 겨우 돈을 마련해 주셨다. 고개가 깊게 숙여져서였을까. 생각보다 빨리 마련된 돈. 조금이라도 불려보겠다고, 딱 3일만 넣어두겠다고 샀던 코인의 이름은 다음날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단 하루 만에 99% 폭락", "코인 창업자 잠적", "사기인가? 실패인가"
단 하루 만에 난,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놈이 되었다.
"알아. 나도 알아. 그 전세사기, 코인사기 그 육시럴 놈들. 그놈들만 아니었어도!"
아버지께서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담배에 불을 붙이신다. 내가 중학교 입학 선물로 '금연'을 얘기한 후 단 한 번도 입에 댄 적 없던 담배를.
"그래도 네가 꼭 가야 하는 거냐. 이 애비를 좀 더 믿어보지 그랬어. 이 애비가 어떻게든 해줄 텐데. 왜 그리 떠나야 하는 거냐..."
"아버지, 어머니. 정말 죄송해요. 정말... 전 이만 가볼게요."
끝까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있다가, 짧은 인사만 남기고 돌아선다. 등 뒤로 어머니의 흐느끼는 소리만 남는다. 태어나서 처음 듣는 아버지의 그것까지도.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여자친구의 집 앞이다. 4년을 만난 사이. 준비가 안 됐다며 결혼을 매번 미루는 게 미안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잘한 선택 아닐까. 이대로 들어가면 분명 혼나겠지. 심호흡을 하고 문 안으로 들어선다.
"대체 왜!"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날아든 머그컵.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지만, 컵은 그대로 현관에 부딪혀 산산조각 난다. 서로의 사진이 새겨졌던 컵. 그 잔해를 주우려다가 그냥 몸을 일으킨다.
"나 혼자 어떻게 살라고! 미친놈아! 이렇게 가면 난 어쩌라고!"
털썩 주저앉은 넌, 무릎에 고개를 파묻은 채 어깨를 떨군다. 가늘게 떨리는 네 모습을, 난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다.
"미안해... 진정해... 진짜 내가 잘못했어......"
위로해주고 싶지만 내 말은 네게 닿지 않는다.
네 어깨를 감싸 안아주고 싶지만 내 팔은 널 지나쳐갈 뿐이다...
얼마나 울었을까. 좀 진정이 된 건지, 내가 사준 인형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말을 붙인다. 친구 놈은 오돌뼈에, 부모님은 내 사진에 말을 걸더니. 내가 남긴 것들이 유독 사소해 보여서 괜히 쓴웃음만 나온다.
"미안해. 결혼을 보채지 않았어도..."
모든 선택에 실수를 한건 난데, 네가 왜 미안해.
"차라리 전에 헤어졌을 때 그대로 끝낼걸..."
아니야. 당장이라도 세상이 끝날 듯 매달린 건 나였어.
"미리 말했으면... 널 혼자 보내진 않았을 텐데..."
그런 말 하지 마. 그 말만은 절대 하지 말아 줘...
널 안으려 해도, 네 뺨을 쓰다듬으려 해도, 네 귀에 어떤 말을 건네려 해도 네게 닿지 않는다. 단 한 번만. 단 한순간만이라도 네게 닿길 간절히 기도한다. 정말 찰나의 순간이라도.
'치지지지직'
발치의 검은 실뭉치에 스파크가 튀더니 낮은 소리가 울린다.
'이제 갈 시간이다.'
"제발... 안돼. 잠시만이라도 더 머무르게 해 줘. 제발 잠시만......"
시간이 이렇게 귀한 줄 몰랐다. 잠시만이라도 더 네 곁에 있고 싶은데. 한 번만이라도 더 안아주고 싶은데. 사랑한다고, 미안하다고, 정말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은데. 보고 싶은 사람이 아직 많은데... 단 1분, 아니 단 1초라도.
간절한 바람에도 검은 실뭉치는 족쇄처럼 내 다리를 끌고 간다. 현관을 지나, 대문을 지나, 검은 버스로. 어느새 버스의 좌석에 앉혀져 있다. 멀어지는 네 창 불빛이 시야에서 사라질 무렵, 발치의 검은 구체에 묻는다.
"난 어디로 가는 거지?"
검은 구체가 치지직 거린다.
'넌 이미 알고 있어. 네가 선택한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