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글은 브런치 초창기에 발행했던 글로, 브런치북 발간을 위해 재발행합니다.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
짹짹짹, 새 지저귐 가득한 평화로운 호숫가. 작은 새와 동물들이 살아가는 아늑한 곳이다. 황금빛 모래톱 위 둥지에 알 여섯 개가 올망졸망하다. 호숫가 몽돌을 닮은 하얀 알 다섯, 작고 노란 알이 하나 놓여 있다.
엄마오리가 노란 알을 보며 흐뭇한 표정으로 말한다.
"이 노란 알 좀 봐. 얼마나 특별하고 예쁜가. 올해도 아이들을 잘 키워내면 좋겠다!"
엄마오리의 귀여운 다짐에 동의하듯 개구리가 첨벙 물에 뛰어든다.
따뜻한 햇살과 엄마 품속에서, 몽돌 같은 알이 하나둘 갈라졌다. 조잘대며 태어난 병아리들 틈에서, 노란 알은 가장 늦게 부화했다. 형과 누나들 사이에 치인 막내는 먹이 한 점 제대로 못 얻고, 덩치도 작아 엄마의 걱정은 날마다 쌓였다.
그래도 반짝이고 귀여운 눈망울을 타고난 덕에, 엄마의 시선은 막내에게 자주 머물렀다. 어느새 엄마오리의 웃음을 따라 종종거리는 여섯 병아리, 그들은 호숫가의 귀여움을 도맡고 있었다.
며칠 내리던 비가 그치자, 호숫가는 다시 잔잔해졌다. 형과 누나들은 물속을 누비며, 날갯짓도 제법 익숙하게 퍼덕였다. 엄마의 사랑을 믿고 당당하던 막내는 자꾸만 물에 빠졌고, 날갯짓은 여전히 어설퍼서 다시 엄마의 걱정 어린 눈을 마주해야 했다.
‘왜 나만 이렇게 안 되는 걸까? 혹시 나만 잘못 태어난 건 아닐까?’
그래도 엄마는 막내만 보면 미소 지으며, 젖은 몸을 조심스레 안아주고 말했다.
"얘야, 넌 정말 특별한 아이란다. 걱정하지 마. 다 잘될 거야."
어느 날, 수다스러운 너구리가 호숫가에 놀러 왔다. 어른 오리들은 뜬소문만 전하고 이상한 유행을 퍼트리는 너구리가 탐탁잖았지만, 막내 병아리에겐 바깥소식을 듣는 일이 무엇보다 즐거웠다.
막내가 형과 누나들보다 덩치도 작고 날갯짓도 서툴다고 하소연하자, 너구리는 귀를 쫑긋 세우더니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내가 내가 옛날에 들은 건데, 못생겼다고 놀림받던 오리가 사실은 백조였던 거야. 너 백조 알아? 세상 끝까지도 날아간다는, 진짜 멋진 새야."
그날 이후, 막내는 물 위에 비친 얼굴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그래. 엄마도 나보고 특별하다고 했잖아? 맞아. 난 그냥 오리가 아니었어. 백조였던 거야. 결국엔, 가장 높이 나는 건 나일 거야.’
막내는 자신만 특별하다고 믿기 시작하더니, 점점 남들을 깔보게 되었다. 형제들이 물장구를 치고 날갯짓을 연습할 때면, 코웃음을 쳤다.
‘참나, 그래 봤자 옆 산 하나 넘기도 벅찰 텐데. 나는 언젠가 저 해 뜨는 곳까지 날아갈 백조라고!’
지나가는 물닭 아저씨는 뒤뚱거리며 벌레나 잡아먹는 게 우습다며 흉보고, 물 위를 미끄러지는 원앙 아줌마에겐 색깔이 촌스럽다고 핀잔을 줬다. 논병아리 누나한테는 덩치도 작다며 깔봤다가, 꽁지깃을 물어뜯기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막내는 너구리가 말하던 백조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목은 짧았고, 덩치도 작았으며, 우아한 날개는커녕 날갯짓조차 버거웠다. 무엇보다 백조의 하얀 깃털은커녕, 가슴과 꼬리 쪽에는 형제들과 다른 푸른 깃털이 하나둘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 낯선 푸른색에 막내는 혼란스러웠고, 때로는 그 색이 두려웠다. 그래도 '넌 특별한 아이야'라는 엄마오리의 말은, 그 두려움을 꾹 참고 견디게 해 주었다.
다시 호수에 놀러 온 너구리는 막내를 보자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와, 너 그 푸른 털 진짜 멋지다! 아, 맞다! 내가 내가 옆 호수 갔을 때 말인데, 너처럼 푸른 털의 오리들이 있었거든! 청… 청둥오리였나? 하얗고 눈이 까만 곰이 산다는 나라에서 왔다던데, 엄청 멀리멀리 날아다닌다더라!"
막내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백조는 아니었을지라도, 나는 청둥오리였어. 푸른 깃털을 펄럭이며 먼 나라까지 날아갈, 멋진 오리였던 거야.’
호수의 키 큰 풀들이 색을 바꾸고, 바람이 차가워지자, 항상 막내를 응원하던 엄마도 조금씩 날갯짓 연습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형과 누나들은 이미 하늘을 자유롭게 날고 있었다.
그래도 막내는 ‘맘만 먹으면 난 누구보다 높이 날 수 있어. 난 청둥오리니까.’ 라며 연습을 미뤘다.
엄마오리는 아직 잠수가 서툰 막내를 위해 계속 물고기를 잡아다 주었지만, 그 눈빛에는 자꾸만 큰 걱정과 슬픔이 배어났다. 결국 그 슬픔은 형제들에게도 옮겨졌고, 그들은 그 감정을 분노로 바꿔 막내에게 쏟아냈다.
"막내야, 이제 정도껏 하자. 최소한 노력은 해야지." "너 때문에 엄마가 하루 종일 너만 돌보잖아. 자기 앞가림은 좀 하라고."
막내는 멋진 청둥오리인 자신을 몰라주는 형제들이 답답했다. 하지만 엄마의 슬픈 표정을 보고는 문득, 자신이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니, 사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의 잘못을.
형제들의 눈치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스스로도 부끄러웠던 걸까. 막내는 결심했다. 산 너머 호수에 있다는, 너구리가 말한 푸른 깃털의 청둥오리들. 혹시, 그들이 진짜 가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 믿음 하나로 막내는 길을 나섰다.
하지만 홀로 떠난 여행길은 생각보다 훨씬 길고 힘들었다. 형과 누나들은 그렇게 멀리도 단숨에 날아갔는데, 막내는 몇 날 몇 밤이 지나도록 걷고 또 걸어도, 풍경이 바뀌질 않았다.
배는 고팠고, 물고기를 대신해 흙을 뒤져 벌레를 잡아먹었다. 한때 비웃던 물닭 아저씨가 떠올랐다.
"벌레나 주워 먹고사는 주제에."
그 말을 했던 자신이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졌다.
‘물고기가 먹고 싶어. 엄마가 보고 싶어.’
‘그래, 청둥오리들 만나면 뭐가 달라지겠어. 난 아직 제대로 날지도 못하는데.’
엄마가 보고 싶다.
아니, 엄마가 필요하다.
돌아가자.
지금이라도.
그날 밤, 산속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여우와 늑대 울음소리. 막내는 겁에 질려 달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다시 호숫가로.
다시, 엄마가 있는 그곳으로.
'엄마, 미안해'를 되뇌며...
겨우 돌아온 호수는 놀라울 만큼 조용했다. 부모도, 형제도, 원앙도, 물닭도 없었다. 깃털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만이, 소름 돋을 만큼 차가웠다.
막내는 떨리는 목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 그때였다. 수풀 너머 낙엽이 부스럭거리며 들썩였고, 너구리가 얼굴을 내밀었다. 평소보다 더 처진 눈매로 막내를 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너 어디 갔었냐… 너희 엄마, 너 기다리면서 많이 울더라. 겨울 되면 떠나야 하잖아. 너한테 계속 말씀하셨다던데…"
막내는 고개를 떨군 채 말이 없었다. 알고 있었다. 왜 엄마가 그토록 날갯짓을 재촉했는지, 왜 그 눈빛이 자꾸 슬퍼졌는지. 다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나는 청둥오리니까. 당연히 날 수 있을 줄 알았으니까.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너구리가 꼬리를 흔들며 말문을 열었다. 눈치 없이.
"아, 맞다! 내가 내가 어제 사람들 마을에 갔거든? 거기 너랑 진짜 똑같이 생긴 애들이 있었어. 푸른 깃털에 누런 빛도 섞였고 부리도 뾰족한 게 너랑 똑같더라. 이름이 뭐더라… 기억이 안 나네… 근데 날진 못한대."
뭐? 날지 못한다고?
막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이내 날개를 퍼덕이며 발톱을 휘두른다.
"그만해!"
너구리는 깜짝 놀라 뒷걸음치며 말한다.
"야! 왜 그래! 난 그냥…"
막내의 흔들리는 눈을 본 너구리는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수풀 속으로 사라진다.
하염없이 서 있던 막내. 호수 위에 달빛이 스며들 즈음, 그는 터벅터벅 둥지로 향한다.
부서진 둥지.
그 안에 몸을 구겨 넣으며 막내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엄마… 미안해."
밤의 호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바람이 마른 풀숲을 스치는 소리만 난다.
며칠 후. 호숫가 가까운 농장.
"아빠, 오늘은 뭐 잡았어요?"
귀여운 양갈래머리 농장 딸이 묻자, 농장주인이 대답한다.
"어, 오리들 다 날아간 호수에 이상한 게 하나 남아 있더라. 꼼짝도 안 하고 가만있어서, 그냥 들고 왔지."
"가만히요? 날아서 도망도 안 치고요? 근데 왜 오리 둥지에 있었을까요?"
딸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는다.
"글쎄. 닭 주제에 자기가 오리인 줄 알았던 거겠지. 요즘엔,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사는 사람들이 더 많잖아. 진짜 자신을 마주하려 들지 않는 거야."
딸이 웃으며 말한다.
"아빠가 맨날 하는 말씀이네요. 잘 나온 사진만 자신이라고 착각하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