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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을 보고서

by 솔라담


※ 본 글은 브런치 초창기에 발행했던 글로, 브런치북 발간을 위해 재발행합니다.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



"저녁 먹고 합시다."
부장놈의 지긋지긋한 목소리. 또 야근이다.
대기업 기획팀에 입사했다고 온 가족이 잔치를 벌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송별연이었나 보다.
그 이후로, 가족 얼굴을 마주한 기억이 없다.

「올해 요식업 근황과 트렌드」
몇 글자 되지도 않는 주제 하나가 며칠째 내 발목에 족쇄처럼 매달려 있다.
보기엔 가벼웠지만, 끌어보니 만근추다.
내 역량 부족일까. 아니면 부장놈 눈치 때문일까.
예전엔 몰랐는데, 난 개구리였던 모양이다.
부장놈 그 째진 뱀눈만 봐도 얼어붙는 걸 보면.
오늘은, 진짜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자료 찾는 건 대학교 때 이미 질리고 질렸다.
그게 회사 와서 할 일의 연습이었구나.
질리고, 또 질린다.
하기사, 남의 돈 받는 일이 쉽겠냐만은.
그래도 그때보단 나은 게 하나 있긴 하다.
참고문헌은 안 적어도 되니까.

아뿔싸. 참고문헌?
맞다. 안 적는다는 건 곧 — 어디서 가져왔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뜻.
뭐, 어때.
검색창을 열고 쓴다. '올해 요식업 트렌드'.




"박 대리, 보고서 좋았어. 봐, 하면 되잖아. 다음에도 부탁해."
대충 긁어온 보고서에 싱글벙글이라니.
부장놈 안목이 한심스러우면서도, 내가 썼던 보고서들이 떠올라 씁쓸하다.


요즘은 글을 쓸 플랫폼이 워낙 많아서일까, 조금만 찾아봐도 잘 만든 리포트가 널리고 널렸다.

변화된 카페 트렌드, 요식업체별 매출 분석.
여기서 조금 긁어오고, 저기서 붙이고, 거기서 한 줄 더 하면 보고서 한 편쯤은 뚝딱이다.


누가 그랬던가, know-how를 지나서 이제는 know-where의 시대라고.
좋은 걸 찾는 게 능력인 세상이다.
정보는 넘치고, 주인은 없다.

'저녁이 있는 삶'이라.
누가 한 배부른 소리냐 싶었는데, 암.
사람은 저녁을 집에서 먹어야지.

영화도 보고, 밤산책도 하고.
가정의 평화는 결국, 시간으로 사는 거다.
오늘도 아들 손 잡고 동네를 돈다.
유치원에 들어간 녀석은 요즘 궁금한 게 많다.

"아빠, 돈을 주우면 어떻게 해야 해?"
"주인 찾거나, 경찰서에 갖다 줘야지."
"근데 안 걸리면 써도 되는 거 아냐? 주인은 모르잖아."
"음… 너 자신이 알잖아.
그게 더 무서운 거야.
그게, 양심이거든."

맞다. 그게 더 무서운 거다.
양심.
유치원생도 배우면 아는 거다.
양심.
난... 있는 걸까. 양심?

정보를 찾는 게 능력이고, 조합한 사람이 주인이라 생각했다.
과연, 그게 맞을까.

한참 고민하고 있는데 아이가 내 손을 꼭 쥐며 말한다.

"아빠, 난 남의 거 함부로 안 쓸게!"

아... 없구나.
그런 건 내겐 없구나.
양심은 없구나.

일러진 퇴근 시간.
풀어진 부장의 얼굴.
그런데도 찝찝했던 건,
어쩌면 거울 속 내 모습이
스스로도 한심해 보였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 부끄러움이 이렇게까지 처참한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내가 한 건,
남의 것을, 베껴 쓴 일이었다는 걸.




몇 달 후.


"박 대리, 요즘 보고서 좀 단조로워졌나 싶었는데… 예전처럼. 근데 또다시 보니까, 이게 낫네. 뭔가 더 살아 있는 느낌이야."

부장은 놀면서 딴 직함은 아닌가 보다. 뱀눈인 줄만 알았는데, 작품을 볼 줄도 안다. 공들인 보람이 있어... 다행이다.

오늘은 아들을 마주 보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빠는 네가, 그리고 내가 자랑스럽다고.

다행이다.
찾아서.
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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