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우산을 챙겨야겠어요.

by 솔라담




오늘은 우산을 챙겨야겠다.
비는 오지 않는다. 일기예보의 강수확률은 20%. 아예 확률이 없는 건 아니지만, 보통 우산을 챙길 수준은 아니다. 평소라면 나도 그랬겠지. 다만, 오늘만큼은 등에 업은 가방에 작은 접이식 우산을 하나 챙겨 넣는다.

"대리님 준비성 철저하시네요?"
가방에서 꺼낸 우산을 보며 농을 거는 여직원의 말에 웃으며 답한다.
"그냥, 오늘은 챙기고 싶었어요."

사실 오늘 하루만큼은 연차를 내고 싶었는데... 대리라는 직급은 누구를 대리하는 건지 모르겠으나, 내가 연차를 냈을 때 날 대리해 줄 사람은 아직 없나 보더라.

평소와 같은 하루. 바쁜 일상. 내 마음과 다르게 쨍쨍한 날씨는 눈치 없이 덥기만 하다. 오늘은 여덟 시 전에 퇴근할 수 있을까? 이번 클라이언트도 언제나처럼 만만치 않다. 그놈의 '괜찮긴 한데...'라는 말. 분명 요청한 대로 만들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요청사항이 휙휙 바뀐다. 순간 땡깡 부리는 꼬마애 같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터진다.

남 얘기가 아니다. 내가 여섯 살 때였나. 월드콘이 먹고 싶다는 말에 냉큼 슈퍼에 다녀오신 할아버지. 거기에 대고 왜 죠스바를 안 사 왔냐고 울고불던 모습이 떠오른다. 진짜 말도 안 되는 투정. 지금 내 앞에 있다면 한 대 쥐어박아주고 싶다. 그런 날 난처하게 바라보시던 할아버지. 할아버지께서는 죠스바를 사주지 못해서 진심으로 미안해하셨다. 분명 내가 월드콘이 먹고 싶다고 했었음에도...

책상 구석, 가습기의 연무를 멍하니 지켜봐서였을까.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뭉게뭉게 떠오른다. 내가 아직도 좋아하는 아나고회. 그걸 사주시겠다고 날 업고서 갔던 시장. 그런데 장어대가리에 못질을 하는 순간 내가 경기를 일으킬 줄은 생각도 못하셨을 거다. 날 달래주시던 놀란 얼굴. 눈물을 닦아주시던 까끌거리던 손가락. 장어가 불쌍하다고 펑펑 울다가, 훌쩍거리며 씹던 아나고회의 고소함은 아직도 혀끝에 맴돈다.

내 유년기의 눈높이는 항상 높았다. 할아버지께서는 어딜 가든 날 업어주셨으니까. 아마도 지독하게 걷는 걸 싫어하는 내 성향은 할아버지께서 만드신 게 아닐까. 할아버지의 따뜻한 온기. 아늑한 냄새. 장화에 우비까지 입은 날 업으시고, 한 손에는 우산을 드신 채 집으로 돌아가던 골목길. 젖어가던 할아버지의 머리카락. 뽀송했던 내 우비. 등 위에서 들리던 빗소리는 왜 그리 흥겨웠는지 모르겠다.

오늘 하루쯤은 정말 연차를 내고 싶었다. 할아버지 묘소에 가서 술 한잔 따라드리고, 딱딱한 묘비라도 꼭 안아드리고 싶었는데. 아니, 폭 안기고 싶었는데... 기일을 챙기지도 못한다는 생각에 괜히 서류만 구겨버린다. 옆에 계신다면 분명 괜찮다고 하시겠지. 뭘 그런 걸 신경 쓰냐며 되려 난처한 표정을 지으시겠지. 그럼 난 그 따스한 등에 업혀서 모든 걱정을 잃을 수 있을 텐데......

우산을 챙겨 와서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keyword
수요일 연재
이전 05화화투판 빈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