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글은 브런치 초창기에 발행했던 글로, 브런치북 발간을 위해 재발행합니다.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
“화투 치던 김 씨 어디 갔나~ 종로에 갔나~ 소피보러 갔나~
오늘은 자기가 이긴다더니, 어디 가서 안 오시나~”
눈앞에서 김 씨를 신나게 약 올리는 건 박 씨 노인이다.
“안 해!”
김 씨는 또 역정을 낸다.
푼돈 내기라지만, 이번 달만 털린 담배가 몇 갑인지.
그보다 더 얄미운 건, 저 약 올리는 상판이다.
열심히 산다고 화투판은 멀리했는데,
이제 와선 진심으로 억울할 지경이다.
“그나저나 황 씨 얘기 들었어?”
끼어든 이 영감의 말에, 화투판 위로 잠깐 정적이 흘렀다.
이 동네서 알아주던 부잣집 황 씨.
쓰러진 지 두 달,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기대만 하는 중이다.
“뭔데.”
짐짓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되묻는 김 씨에게
이 영감이 조용히 말한다.
“갔잖아.”
세 노인의 주름 고랑에 노을빛이 고인 채,
담배 타는 소리만 타닥인다.
황 씨의 장례식장은 서울 어딘가의 대학병원이었다.
그곳엔 화투판도, 소주도 없었다.
동네로 돌아온 세 노인은 허전한 마음을 달래려, 술잔을 기울인다.
“아니, 그 돈 죽어서 싸갈 것도 아니고,
마을 잔치나 시원하게 시켜줄 것이지.
대체 뭔 놈의 대학병원이여, 써글롬.”
박 씨가 이죽거린다.
“의사 며느리 얻었다고 그렇게 자랑하더니만.
무덤에 술 한 잔도 못 부어주게 생겼잖아.
추모관? 비싸기만 더럽게 비싸다더만.”
이 영감이 잔을 기울이며 맞장구친다.
술잔이 몇 번 돌기도 전에, 이 영감의 며느리가 찾아왔다.
“아빠, 의사가 술 먹지 말라 했어요. 치매 치매, 안 돼 안 돼.”
어설픈 한국말의 며느리가 살갑게 이 영감을 부축하고 돌아간다.
“월남이랬나, 말도 이젠 제법 늘었네. 허허. 손주도 둘이나 낳고 말야.”
아직 손주를 보지 못한 박 씨는, 못내 부러운 눈치다.
김 씨도, 일 년에 두 번 보는 손주가 눈에 선하다.
뭐, 영상통화니 동영상이니 뭐니 해도.
사람은, 직접 만져 봐야 한다.
구두쇠니, 광만 파는 광팔이니, 귀신은 언제 저놈 잡아가나 투닥였지만.
황 씨, 그놈 손 한 번만 다시 잡아보면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에.
김 씨는 술을 한 잔 더 들이킨다.
몇 번의 계절이 지난 가을. 세 노인은 여느 때처럼 화투판에 모여있다.
“캬, 오늘은 되는 날이구나. 아주 쩍쩍 붙네 그려, 쓰리고야.”
김 씨는 오랜만에 박 씨를 이겨 먹을 생각에, 괜히 흥이 올랐다.
약 오른다면서도 웃고 있는 박 씨를 보니,
아마 오늘은 하루쯤 잃어주는 날인가 보다.
“아니, 아까도 쓰리고 가더만. 오늘 김 씨 난리네.
황 씨 양반 없으니 똥패 잡고도 죽지도 못하고 말야. 대체 언제 오려나, 그 양반은.”
이 영감의 한마디에 화투판은 순간 얼어붙는다.
“그러게 말야. 와서 광이나 팔아야지. 어디서 뭐 하는지 말이다. 보고 싶네, 그놈.”
처음이 아니다 보니, 박 씨의 대답도 자연스럽다.
“아, 고박이네. 김 씨, 나 피박까지 있는데, 어쩔 거야. 허허허허.”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없어진 건지.
이 영감은 신나서 점수를 계산한다.
“아빠, 오늘 가야 해요. 병원, 할아버지들 안녕하세요.”
이영감 며느리가 와서 이 영감을 부축해 간다.
캄보디아에서 왔다던데, 항상 저렇게 살갑다.
“거 참. 화투 치던 사람 데려가는 게 반갑기도 하네 그려. 허허.”
김 씨의 너털웃음.
“둘만 남았는데 맞고라도 칠런가?”
박 씨의 제안에 김 씨는 고개를 젓는다.
“하긴, 화투는 넷이 쳐야 재밌지. 한놈은 광 팔고 말야. 그나저나 나 가면 장례식장 와줄 거지?”
박 씨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재미없는 농담을 건넨다.
“양심도 없다, 이놈아.
이미 뜯긴 게 얼만데 부의금까지 뜯어가려고?
육개장만 먹고 바로 나올 거다.”
김 씨가 웃으며 받아친다.
그리고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가는 건 괜찮아.
그런데 마지막만 아니면 좋겠어.
외로운 건 싫거든.”
김 씨의 주름고랑에 찬바람이 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