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님이 "호숫가의 브런치를 좋아하세요?" 글을 라이킷 했습니다.
"무슨 좋은 일 있어? 왜 그렇게 웃고 있어?" 지나가던 박 차장이 물었다.
"네? 저요? 아, 애한테 메시지가 와서요." 대충 얼버무렸지만 박 차장은 아직도 의아한 표정이다. 내가 그렇게 웃었나? 하긴 기분 좋은 건 사실이다.
[내사랑] 이거 뭐야? 브런치? 이 작가 누군데? 호숫가 브런치 완전 우리 얘기 같아 ㅋㅋ
[내사랑] 마음에 드는데 라이킷이 좋아요야?
[소중한딸] 나도 그거 좋더라. 근데 '첫 만남' 이것도 난 좋았어. 연인 얘기가 아니고 딸 출산 얘기라 좀 놀람.
[소중한딸] 나 태어날 때 아빠도 이랬어? 암튼 이 작가 괜찮네. 아빠 아는 사람이야?
[내사랑] 그러게. 너희 아빠도 이런 감성 좀 있었으면 좋겠다ㅋㅋ
'작가라고? 내가 무슨. 오글거리게...'
그런데 눈앞에 이 얼굴은 뭐 이리 실없이 해죽거리나. 주책없이.
모니터에 비춘 내 얼굴 말이다.
나는 글이 좋았다. 열 살 무렵, '소나기'를 읽은 다음날. 퉁퉁 부은 눈 때문에 울보라는 별명이 붙었었다. 중학교 때는 '그날이 오면'을 읽고 가죽으로 된 북이 되어 그날이 왔다! 를 부르짖는 꿈을 꿨었다. 고등학교 때는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가 입에 붙어 친구들에게 '이상한 놈'이라고 놀림을 받기도 했다. 그래, 나는 문학을 좋아했었다.
감명도 잠시. 날개는 '자아 분열과 현실 도피'로, 소나기는 '순수한 첫사랑의 아름다움과 상실'이라는 주제로 외워야 했다. 내 해석이 아닌 교과서의 해석을 외우고, 정답만 추구하는 삶. 내 선택은 아니었지만, 제대로 된 인간이 가야 하는 마땅한 길이라 믿었다.
마땅한 길은 '남부럽지 않은 가장'이란 곳으로 날 이끌었다. 안정된 직장. 다정한 가족. 어느 대문호의 말대로 비슷한 모습의 행복한 가정을 이뤘다. 분명 좋았지만, 한 번씩 골방에서 동전을 받으며 기뻐하던 그 박제된 천재가 떠오른 건 왜였을까.
몇 달 전, 결혼기념일.
"네 아빠가 얼마나 웃긴지 아니? OT때 내가 분홍색 스웨터를 입었다고 반했다는 거야. 제정신 아닌 줄 알았다니까. 그런데 둘 다 소나기가 인생작이라는 점에서 좀 다시 봐주긴 했지."
사실이다. '이제 내가 앓다 죽으면 이 옷도 묻어줄 거지?'라는 농담도 들었었다.
"첫 데이트는 또 어땠는지 아니? 호숫가 카페에 갔는데, 브런치를 시킨다니까 오후 두 시에 무슨 브런치냐고, 브런치가 무슨 뜻인지 모르냐는 거야. 그냥 T가 아니고 아주 왕대문자T 라니까. 소나기는 대체 왜 좋아한 거래. 호호"
"맞아! 아빠는 완전 이과그잡채잖아. 감성이 없어! 하하"
웃으며 맞장구치는 딸.
"아니, 사전적 의미를 좀 생각해 보라고..."
스마트폰에 브런치를 검색해서 보여주려는데, 이미 둘 다 내 말은 들을 생각도 없이 웃기 바쁘다. "에휴 둘 다 귀여워서 봐준다!" 웃어넘기고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돌리자, 처음 보는 브런치가 눈에 들어왔다.
'브런치 스토리...?'
집에 돌아와 자세히 살펴봤다. '작품이 되는 이야기', '내가 작가가 되는 곳'. 내가 작가가 된다고? 순간, 수숫단 속에서 소녀와 비를 피하던 소년처럼 가슴이 뛰었다. 대문자T로 불리는, 지금의 내가 걸어온 길이 아닌. 30년 전, 소녀와 송아지를 타고 싶던 소년. 그 소년이 걷고 싶었던 길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아, 이번에는 이 길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일에만 몰두해 살아온 내가 브런치에 글을 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 편의 글로 발행 자격을 얻어야 했는데, 적당히 쓴 글로는 어림도 없었다. 두 번이나 떨어지고 나니 그냥 확, 내 역작인 논문을 올릴까도 싶었지만... 업무를 보듯 온갖 작문서를 파고들고, 브런치에 올라온 글쓰기 노하우를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렇게 '호숫가 브런치를 좋아하세요?', '첫 만남'. 그리고 내 삶을 돌아본 '나의 두 길'을 완성했다.
종로의 종에 머리라도 들이받겠다는 심정으로 합격 소식을 기다리던 나날. 결국 어제, 비로소 '그날'이 왔다. "우와!!" 내지른 환호성에, 무슨 일이냐며 달려온 아내와 딸. 난 지극히 정상이라는 걸 증명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헤실거리니 어찌나 이상해 보였을지 이해는 간다.
오늘 아침 식사자리에서 슬쩍 말을 꺼냈었다.
"내가 괜찮은 글 봤는데 톡방에 올릴 테니 이따 읽어봐."
둘 다 별 관심 없어 보여 시무룩했었는데, 방금 전 메시지를 보니 꽤나 재밌게들 읽은 모양이다. 내가 썼다는 걸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기대된다. 게다가 처음 듣는 '작가'라는 호칭에 민망하면서도 기분이 몽실몽실해서 웃음을 참고 있는데, 그걸 박 차장이 본 것이었다. 저 눈치 없는 차장이 보기에도 실실거렸다니, 어지간히 기분이 좋긴 했나 보다.
점심시간. 회사 옥상에 올라 기지개를 켠다. 건물 아래로 사람들이 보인다. 각자의 길을 열심히 걷는 사람들. 다행히 난 아직 박제까지는 되지 않았었나 보다. 새로운 길을 찾아낸 걸 보면.
아직도 민망하지만 내가 작가라니. 작가. 작가. 어감조차 설레는 단어를 되뇌다 보니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렵다. 나도 모르게, 슬며시 웃으며 평소 아끼던 문장을 조용히 읊조린다.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