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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

by 솔라담



밑동의 큰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거대한 메타세쿼이아 나무. 그는 그 아래에 서 있었다.
한창 달리고 숨을 고르는 짐승처럼, 차에서는 아직 온기가 느껴졌다. 불어오는 찬 바람에 곧 식어버릴 온기. 그는 오른쪽 눈두덩 안쪽에서 익숙한 이물감을 느낀다. 늘 그랬다. 이 나무 앞에만 서면.

차 뒤로는 거대한 가로수가 두 줄로 줄지어 서 있었다. 내년을 기다리며 잔뜩 움츠린 몰골의 나무들. 그 사이로 2차선 도로가 멀리까지 이어진다. 발밑에는 낙엽이 가득했다. 밟히고 또 밟혀 바스러진 것들. 나뭇가지엔 새로운 푸르름이 약속되어 있다지만, 저 낙엽들은 무슨 희망으로 지난 계절을 버텨냈을까.
어쩌면 손톱처럼. 잘라도 잘라도 돋아나지만 또다시 깎여나가서, 결국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못하는 존재가 아닐까.

그 생각에 이르자, 그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애써 외면했던, 그를 이곳으로 이끈 이유. 그것이 또다시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손톱 같은 기억이었다. 짧게 잘라내도, 어느새 다시 자라나 살을 파고들어 할퀴고, 피를 낸다. 아무리 짧게 잘라내도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어김없이 다시 자라난다. 그가 가장 최근에 이 기억을 잘라낸 게 언제였더라. 올봄이었나.

'윽.'
그는 나직이 신음했다. 두통. 머릿속의 손톱 같은 기억이 존재를 내세우는 방식이다. 차 문을 열어 아스피린을 찾았지만, 얼마간 잠잠했던 탓에 두고 온 모양이다. 이제 또 한동안 이 기억이 머릿속에서 자라며 상처를 내겠지. 사람은 모든 것에 익숙해진다지만, 이 두통만큼은 아니었다. 대체 그에게 이 기억은 무엇 때문에 이토록 끝없이 자라나는 것일까... 이렇게까지 고통을 주면서...


싸늘한 바람이 그의 귓가를 스친다. 아주 부드럽게. 귓바퀴를 타고 그 속으로 들어간다. 그의 머릿속 가장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자라나는 손톱 같은 기억을 들여다본다.



이건 바람이 본 것이다.

심연같이 검은 눈이 매력적이던 그녀. 분홍색 털 스웨터가 하얀 피부와 한 벌인 듯 어울렸다. 가냘픈 어깨를 지나 한 붓에 이어진 듯한 하얀 손. 그 끝의 단정한 손톱은 그림을 완성하는 마침표 같았다. 하얀 벨벳 같은 손이 뺨을 스칠 때 그의 심장은 움직였다. 그녀의 미소에 웃었고 그녀의 슬픔에 비참했다. 그렇게 사랑했던 그녀가 손톱 같은 기억으로 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는 죽었다. 그의 눈앞에서.

첫사랑이었다. 몇 년을 노력해 겨우 그녀의 마음을 얻었을 때, 그는 세상 모든 영웅보다 위대했고, 어떤 현자보다 행복했다. 그는 그녀를 통해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었다. 둘만의 첫 여행.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을 지나 얕은 계곡 옆에 차를 세웠다. 여름밤, 차 안에서 그들은 축복 같은 빛을 보았다. 태초의 어둠 속에서 흩날리는 초록빛의 향연. 반딧불이였다. 빛의 실은 어둠 속에서 몽롱하게 그림을 그리며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빛줄기 하나가 차 안으로 스며들었다. 어딘가의 틈을 찾아 들어온 것일까, 아니면 환상? 빛은 둘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마주친 두 눈, 첫 입맞춤. 시간이 멈췄다. 짧지만 영원했던 순간. 그는 황홀경 속에, 오른쪽 눈두덩 위로 따뜻한 무언가가 맺히는 것을 느꼈다.

늦은 밤, 녹음이 짙은 가로수길을 지나 돌아오는 길. 그녀는 차창에 기대 잠들어 있었다. 그에게 세상의 행복을 알게 해 준 사람. 운전대를 잡은 그는 그녀의 핏빛처럼 붉은 입술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입맞춤의 순간에 정신을 너무 오래 빼앗긴 걸까... 순간, 그녀의 얼굴 옆, 차창으로 나무 한 그루가 빠르게 다가온다. '뭐지...?'

'콰-앙!'
고요했던 가로수길을 뒤흔든 굉음. 몇 분이 흘렀는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연기가 자욱한 차 밖에 있었다. 반대쪽으로 기어가 문을 열고 그녀를 끌어냈다. 하얀 캔버스 위에 누군가 붉은 물감을 흩뿌린 건가. 몽롱한 정신. 무언가 잘못되었다. 그녀의 손. 그 하얀 깃털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정신이 더욱 몽롱해진다. 희미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하얀 팔에 쩍 하고 빨간 금이 갔다. 붉게 물든 손톱. 그 끝이 뚝, 뚝 떨어지며 바닥을 적셔간다. 그리고 그 옆의 메타세쿼이아 한 그루.

바람이 본 마지막 순간이다. 스쳐간 바람은 어느새 저 멀리 불어갔다.



'으으으윽'
그 메타세쿼이아 앞에서 그는 머리를 감싸 쥔 채 주저앉는다. 그토록 애써 잊고 있었던 기억. 기껏 깎아냈던 기억 아니 손톱이 다시 마구 자라난다. 애써 잊으려 했던 나무. 그녀와의 입맞춤. 우측 눈 윗부분을 꾸욱 꾸욱 누르고 있다. 입맞춤 순간의 온기를 느꼈던 곳. 바로 그곳이 터질 듯 아프다. 그는 머리를 뜯어내려는 듯 양손으로 부여잡고 바닥을 뒹군다.
툭, 무언가 고통을 담당하는 뇌의 한 부분을 잘라낸 것처럼. 통증이 멎고 정신이 아득해진다.
끝없이... 끝없이......





몇 달이 지났을까.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나무 아래 숨을 고르듯 온기를 식히는 차 한 대. 그 안에 한 연인이 있다. 남자는 나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게 메타세쿼이아라는 건데, 침엽수면서 낙엽이 진대. 웃기지? 백악기 때부터 그대로라 화석나무라고도 하고….”
차의 라디오에서 음악이 멈추고, 뉴스가 흘러나온다.

"저녁 뉴스입니다. 지난 10월 메타세쿼이아길에서 발견된 20대 남성 변사 사건의 부검 결과가 발표됐습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사망자의 두개골 내부에서 약 2센티미터 길이의 이물질이 발견됐으며, 성분 분석 결과 손톱 조직으로 확인됐다고 밝혔습니다. 의학계는 이례적인 사례라며 추가 연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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