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꼬리

by 솔라담



꼬리가 자신의 것임을 잊은 짐승은 평생을 그것에 쫓기며 살아간다.

은퇴한 은행원 김지점장도 그렇다.
어느 날부터 무언가가 그의 뒤를 따라다닌다.
정체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은 분명 존재한다.
주위 사람들은 그것을 아는 눈치지만, 누구 하나 그것에 대해 입을 열지 않는다.
모두가 감추는 '그것'
그의 꼬리는, 대체 무엇인가.


퇴직 후 처음으로 동창들을 만난다는 기대에, 김지점장은 한참을 꾸며 입고 나섰다.
오랜만의 외출에 조금 과하게 멋을 부린 탓일까? 계절에 맞지 않는 두꺼운 옷 안으로 끈적한 땀이 흐른다.
또각또각. 은행원 출신답게 걸음은 단정하고,
구두 소리는 마치 메트로놈처럼 일정하다.

멀리서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한때 사회에서 존경받던 이들이지만,
지금 보니 다들 십 년은 늙어 보인다.
"왜 이렇게 두껍게 입고 왔어. 감기라도 걸렸어?"
걱정 섞인 인사에 김지점장은 멋쩍게 웃으며 응수한다.
"에이, 패션도 모르는 놈들이 무슨. 죄다 노인네들처럼 입고 왔으면서. 허허."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술잔이 오간다.
안주는 언제나처럼 옛날이야기다.
이 친구들만 만나면, 40년 전 대학 시절로 돌아간 듯 마음이 들뜬다.
어릴 적 이야기, 자식 이야기, 여기저기 쑤신다든가 잠이 안 온다는 넋두리까지 끝나갈 즈음, 한 녀석이 슬쩍 탄핵 이야기를 꺼낸다.
요즘 뉴스에 빠지지 않는 그 주제다. 김지점장도 가볍게 맞장구친다.
"근데 대통령도 불쌍하긴 하지. 어릴 적 부모님 다 흉탄에 여의고 말이야. 난 좀 불쌍하더라."

순간, 왁자지껄하던 공간을 장악한 소름 끼치는 정적.
맞은편 김 사장과 박 원장이 눈빛을 슬쩍 교환하고, 옆자리에서 짧은 한숨 소리도 얼핏 들린다.
마치 자신에게만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친구들 사이에서만큼은 느끼고 싶지 않았던, 싸늘한 거리감이었다.

'뭐지, 왜 이렇게 싸늘해졌지?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김지점장은 그렇게 생각하며, 어색한 침묵을 걷어내려 애쓴다.
"자, 자. 정치 얘긴 그만하고, 오늘은 내가 한턱내는 날이잖아. 얼른 먹자고."
김지점장의 가벼운 목소리에 박 원장이 어색하게 맞장구 쳐주며 건배를 권한다.
분위기는 풀렸지만, 무언가 삼킨 듯한 김 사장의 표정이 눈에 밟힌다.


한 달 후.
오랜만에 찾은 강남역.
얼마 전 '강남스타일'이 세계적으로 뜨고 난 뒤, 이 동네도 퍽 바뀌었다.
원래 건물들이 이렇게 높았나.
김지점장의 젊은 시절 기억 속 이곳은 허허벌판이었다.
참, 대단한 발전이다.

오늘은 김사장의 둘째 딸 결혼식.
저번에 만난 건, 청첩장을 주기 위한 자리였다고 한다.
그런데 김지점장은 그날을 자신이 밥을 산 날로만 기억한다.
분명 계산도 자기가 했던 것 같은데...
앞뒤가 안 맞지만, 주머니에서 청첩장이 나왔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한 달 만에 다시 만난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런데 어딘가 낯설다.
그를 바라보는 표정이 어색하고, 눈빛도 심상치 않다.
지난 술자리가 끝나갈 무렵, 상속받은 땅 이야기를 꺼낸 뒤부터였을까?
다들 말을 아끼고, 묘한 거리감을 두는 기분이다.
'마음 쓰는 꼴들을 보니, 왜 다들 폭삭 늙었는지 알겠네.'
김지점장은 그렇게 생각하며 씁쓸하게 웃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택시 타라는 아내의 만류에도 김지점장은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몇 정거장을 지나던 중, 내리려는 사람들 틈에서 어딘가 낯익은 얼굴이 흘끗 스친다.
"어, 자네..."
부르려다 말고 김지점장은 멈칫한다.
이름이 도통 떠오르지 않는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옮겨 그 인물을 따라나섰다.
얼마쯤 따라갔을까.
인파 사이로 분명 따라가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 모습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없다.

이상하다. 대체 누구였지, 내가 왜 따라온 거지?
주위를 둘러보는 김지점장의 혼란스러운 표정.
'어, 지금 여기 어디지?'
익숙해야 할 지하철 풍경이 유독 낯설다.
이름 모를 간판들, 처음 보는 역 이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은 유난히 자신을 힐끗거리는 것 같고, 누구의 것인지 모를 수군거림이 귓가를 맴돈다.
'아니, 대체 뭐지. 누가 날 유도한 건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저 멀리 군복 입은 남자가 황급히 자리를 피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군인이 왜? 설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혼란 속에, 땀에 젖은 등골이 서늘하다.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니다.
누군가 자신을 어디론가 유도하거나, 꼬리처럼 따라붙는 느낌.
길에서 이민 간 처형을 우연히 만나 반가운 마음에 따라가던 순간,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진 적이 있다.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처형이 지금 들어온 건가?" 하고 물었지만, 아내는 고개를 갸웃하며 "형님이 왜 오세요? 지금 외국에 계시잖아요"라고 되물었다.
쇼핑 중에 아내와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보고 따라가다 길을 잃은 적도 있다.
누군가가 꼬리처럼 뒤에 붙어 있다는 것도 확실하다.
이상한 예감에 뒤를 돌아보면, 황급히 몸을 돌리거나 눈앞에서 사라진다.
특히 자신을 찍고 있는 듯한, 네모난 카메라들.
김지점장은 그들에게서 설명할 수 없는 위협을 느낀다.


'혹시 누가 날 감시하는 건가? 아니면... 날 일부러 힘들게 해서, 땅을 헐값에 넘기게 만들려고? 아버지의 땅을 노리는 자들의 짓인가?'
김지점장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 모든 일은 요양원에 계시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땅을 물려받은 이후부터 시작된 것 같다.
그 땅은 군부대가 들어설 가능성이 높다며, 제법 값이 나갈 거라는 말도 있었다.
그런데 개발은커녕, 외국 간첩이 사진을 찍었다느니, 전자파가 위험하다는 등의 이해하기 어려운 소문만 무성할 뿐이다.
'미군부대일 수도 있다더니... 그래, 틀림없어. 이 땅을 노리고 나를 흔드는 거야.'
김지점장의 머릿속에는, 그 땅과 최근 벌어지는 기이한 일들이 마치 정교하게 맞물린 톱니처럼 돌아간다는 섬뜩한 확신이 점차 또렷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잠을 자긴 했는지조차 모를 몽롱한 상태.
김지점장의 머릿속은 밤새 의심과 불안으로 뒤엉켜 있었다.
실타래처럼 꼬인 생각들 속에서, 단 하나만은 분명했다.
모든 일의 시작은, 그 땅이었다.
'내가 챙기지 못한 걸 하나하나 확인해 보자. 일단 현금은... 맞다, 내 계좌!'

당장 확인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그는 거의 달리다시피 집을 나섰다.
얼마 전까지 근무했던 익숙한 은행.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얼음장 같은 에어컨 바람에 온몸에 닭살이 돋는다.
매일같이 드나들던 이곳이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지는 건 소름 끼치는 이 냉기 때문일까.

처음 보는 청원경찰의 도움을 받아 번호표를 뽑고 자리에 앉는다.
'설마. 내가 여기 지점장을 몇 년을 했는데… 무슨 짓을 해놨겠어.'
반신반의하며, 고개를 숙인 채 차례를 기다린다.

창구에 다가선 김지점장은 낯선 직원을 마주한다.
"처음 보는 얼굴이군. 내 통장 정리 좀 해주게."
평소처럼 통장을 내밀자, 젊은 직원은 통장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든다.


"고객님, 이 통장은 장기간 거래가 없어 현재 거래 정지 상태입니다."
"무슨 소리야. 잘 확인해 봐. 내가 매달 와서 정리하는데."

직원이 다시 확인하는 동안, 김지점장은 천천히 은행 안을 둘러본다.
분명 얼마 전까지 자신이 근무하던 곳과 닮았다.
하지만, 미묘하게 다르다.
벽의 색, 책상의 배치, 직원들의 얼굴. 사소한 것들이 조금씩 어긋나 있다.


그 순간, 찌릿!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싸한 감각.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확신이 온몸에 퍼진다.

"잠깐, 너희 뭐야.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야?
내가 이 은행에서만 몇십 년을 거래했어! 여기 지점장 출신이라고! 도대체 왜, 내가 왜 거래 정지냐고... 너희 간첩이랑 한통속이지?"
억울함과 분노에, 목의 핏줄이 터질 듯한 고함이 터져 나온다.

일제히 쏠리는 주변의 시선.
수군거림, 속삭임, 한숨, 피식거림.
그 모든 소리가, 자신을 조롱하고 몰아세우는 음모처럼 들린다.

직원은 당황한 얼굴로 말한다.
"고객님, 진정하시고... 제가 다시 확인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김지점장이 폭발한다.
"이거 봐! 다들 한패 아니야? 내 땅 노리고 죄다 작당한 거지! 내 통장을 왜, 내 맘대로 못 한다는 건데! 이거 다 간첩들 짓이잖아!"

그의 외침과 동시에, 은행을 순식간에 장악한 소름 끼치는 정적.

그때, 익숙한 얼굴이 허겁지겁 다가왔다. 지점장으로 보이는 남자.
가까이서 보니, 예전에 자신이 한참 챙겨줬던 막내다.
"아이고, 선배님... 정말 죄송합니다. 전산에 뭔가 착오가 있었나 봅니다. 제가 직접 확인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어깨는 들썩이고, 숨은 거칠다.
그러나 더는 소란을 피울 수 없어, 못 이긴 척 은행을 나선다.
김지점장의 내면엔 굴욕과 함께 차가운 확신이 맺힌다.
'이젠 은행까지 나를 막는구나!'


집에 돌아와서도 분노와 불안은 가시지 않는다.
누군가가 자신을 감시하고, 조종하고 있다는 감각.
더는 착각이 아니다. 확신에 가깝다.
김지점장은 아버지의 땅을 함께 상속받은 동생에게 전화를 건다.

공. 삼. 일. 칠. 공. 칠. 육. 오. 육...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한번.
공. 삼. 일. 칠. 공. 칠. 육. 오...
"없는 번호입니다."

무언가 이상하다. 이 번호, 틀림없이 맞는데.
불안한 마음에 아내를 부른다.
"여보, 나 며칠 전에 동생이랑 통화했었지?

근데 지금 전화가 안 돼. 뭔가 이상해."
아내는 잠시 말을 아끼다, 슬픔이 어려 있는 얼굴로 고개를 젓는다.
"당신 동생, 요양원에 있잖아요. 그 땅 사건 이후로... 통화한 건 몇 달 전이에요. 그때도 복지사가 잠깐 바꿔준 거였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김지점장은 멍해졌다.
'요양원? 난 분명 며칠 전에 통화했는데?'
'그 건강한 녀석이 갑자기 왜 요양원에 있어?'
의심이 고개를 든다.
'이 여자까지 왜 이러지. 다들 뭔가를 숨기고 있어.'

"거짓말하지 마. 내가 통화한 게 언제인데?"
목소리가 높아진다.
아내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거실에 혼자 남은 김지점장은 주먹을 꽉 쥔다.
맥박이 빨라지고, 등줄기엔 식은땀이 맺힌다.
'다들 왜 이러는 거야. 무슨 음모가 있는 거지?'


아내가 들어간 방 안에선, TV 소리인지 흐느끼는 소리인지 모를 낮은 울음만 새어 나온다.


김지점장은 불안한 마음에 도통 잠이 오지 않는다.
답답한 속을 달랠 겸, 평소 자주 가던 동네 슈퍼를 찾았다. 그런데 언제 공사를 했는지, 간판부터 싹 바뀌어 있다.
끼익, 정겹던 미닫이문 대신 자동문이 스르륵 열린다.
사장 할멈의 인사와 오래된 나무 냄새 대신,
띵동 벨소리와 무취의 하얀 공간이 그를 맞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내가 잘못 온 건가?
할멈이 가게를 이렇게 바꿀 리가 없는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둘러보지만, 어색한 건 오직 그 자신뿐이다.

소주 한 병과 안주거리를 챙겨 계산대로 갔다. 그런데 점원은 보이지 않고, 바코드 리더기와 계산대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셀프 계산대?'
잠시 지켜보니,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바코드를 찍고 카드를 넣는다.
삑, 삑, 기계음이 규칙적으로 울려 퍼진다.

그 앞에 멈춰 선 김지점장.
물건을 내려놓지도 못한 채, 한참을 서 있다.
그러자 힐끗거리는 시선, 속삭임, 수군거림이 다시 시작된다.
김지점장은 휙, 뒤를 돌아본다.
누군가 놀란 듯 몸을 돌려 가게 밖으로 후다닥 사라진다.

또다.
누군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생각.
이번엔 더욱 선명하고, 더욱 확실하다.
'이건 분명 나를 지켜보려는 거야.
내 땅을 노리는 수작이지. 내가 당할 줄 알아?'


기계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 삑삑거리는 기계음.
모든 것이 자신을 향한 감시처럼 느껴진다.
끓어오르는 분노에, 김지점장은 계산도 잊은 채 가게를 박차고 나온다.


서둘러 집으로 향하던 김지점장.
익숙해야 할 길인데, 눈앞을 어지럽히는 낯선 네온사인들.
'대체 여긴 또 어디야?'
귓가에는 정체불명의 음악이 쿵쾅거린다.

주위를 둘러보니, 젊은 놈들이 그를 에워싸고 힐끔거리며 수군거린다.
어떻게든 자리를 벗어나고 싶지만, 어디로 향해야 할지 너무도 혼란스럽다.
'또야… 또 당했어. 이건 날 미치게 하려는 작전이야.'
"비켜, 이 자식들아!"
그는 소리치며 인파를 뚫고 달린다.

그러나 몇 걸음 못 가서
휘청.
그대로 무너진다.

바닥에 쓰러진 그의 위로, 수십 개의 시선이 쏟아진다. 수군거림, 한숨, 피식거림.
그 가운데, 사람의 것이 아닌 시선이 섞여 있다.
무표정하고 네모난 기계의 렌즈들이 일제히 그를 겨눈다.
'찰칵. 찰칵.'
수십 개의 렌즈가 동시에 번쩍인다.
마치 짐승을 조준한 총구처럼.
김지점장은 쓰러진 채, 꼼짝할 수 없다.


"가라! 가라고 이 자식들아! 나 좀 내버려 두라고!!"
그 절규는, 끝내 입 밖으로 나왔는지조차 알 수 없다.
결국, 김지점장은 응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진다.


김지점장은 병원 연락을 받고 달려온 아들과 함께 집에 돌아왔다.
오랜만에 마주한 아들의 얼굴은, 십 년은 더 늙어 있었다.
괜히 속이 상한다.
'이 야밤에 불러냈으니, 그럴 만도 하지...'
불과 몇 시간 만에 늙어버린 듯한 얼굴을 보며,
김지점장은 가슴 깊이 미안함을 느낀다.


거실에 나란히 앉아, 그간 쌓인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낸다.
김지점장은 요즘 주위 사람들이 하나같이 이상하게 군다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아무래도... 네 할아버지한테 물려받은 땅 때문인 것 같아. 올해는 유독 시끄럽네. 박 대통령도 탄핵당하고, 이게 다 뭐람."

그 말을 들은 아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일그러진 얼굴엔, 말로 다 못할 슬픔이 어렸다.

"아버지... 지금은 2025년이에요. 퇴직하신 지도 벌써 십 년이 지났고, 그 땅도 정리된 지 오래예요. 그 일로 작은아버지까지... 온 가족이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정말 다 잊으신 거예요?"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쏟아낸 아들.
한숨을 한번 쉬고 말을 보탠다.
"그리고 지금 탄핵당한 건 박 대통령이 아니라, 윤 대통령이에요."

그 순간, 김지점장은 아들의 얼굴을 천천히 바라본다.
'십 년은 늙어 보인다'가 아니다.
그 얼굴은, 정말로 십 년을 지나온 얼굴이다.

주름이 깊어진 이마,
묵직하게 울리는 목소리.

그 순간.
그의 뒤를 꼬리처럼 따라다니던 그것.
'낯선 시간'이라는 거대한 진실이
순식간에 그를 삼켜버린다.

퍼즐 조각들이 섬뜩하게 맞춰진 순간,
김지점장의 세계는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린다.

김지점장은 털레털레, 마치 뼈마디가 녹아내린 사람처럼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한참 동안 집 안엔 무거운 침묵만 흘렀다.

너무 많은 시간이 한꺼번에 덮쳐서였을까.
그곳의 시간은, 아예 멈춰버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흐느끼다 가라앉은 듯한 아내의 발소리가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그녀가 조심스레 다가가 위로하려는 순간,
김지점장은 허공을 향해 텅 빈 눈을 뜬 채,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박 대통령 탄핵은, 좀 불쌍하긴 해."

keyword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