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일기
퇴사를 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힘겨울만큼 모든 기력을 소진해버린 상태였다. 바깥 바람이 차가운 겨울이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겨울에 태어났으면서도 겨울을 미칠듯이 싫어하는 나는 남쪽으로 도망쳤다. 제주도에서 한달 남짓한 시간 동안 머물기로 했다.
겨울 바다를 몇번이나 찾아갔다. 첫번째 바다에는 해변이 없었다. 현무암이 성벽처럼 쌓여져 있을 뿐이었다. 울퉁불퉁하고 검은 바위를 하나하나 살펴보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내딛어야 했다. 혹여나 미끄러질까 조심하며 바닥만 보고 걸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끝까지 넘어지지 않았다. 그날 지나쳤던 바다와 하늘이 어떤 모양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두번째 바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썰물에 물이 모두 빠진 갯벌처럼 진득한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걸을 때마다 발이 푹푹 빠져서, 이내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걸었다. 바다가 있는 곳까지 가리라 마음 먹고. 지나는 곳마다 하얗게 바랜 조개껍질과 검게 말라버린 해초가 버려져있었다. 제 각기다른 모습으로. 근데 모두 말을 하고 있었다. 같은 입모양으로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과거의 기억을 회상하듯 그 노랫말을 그러모았다. 앞으로 갈수록 발이 더욱 깊게 빠져서 바다까지 가지 못했다. 가는 길이 즐거웠기에, 가지 않아도 괜찮았다.
세번째 바다에는 바람이 많이 불었다. 안그래도 바람이 많이 부는 제주도였지만, 바다에 가까워질수록 바닷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모랫바람이 거칠게 해변을 쓸어, 걸어간 흔적이 금새 사라질 정도였다. 거칠 것 없이 높아졌다가, 다시 아래로 떨어지는 파도의 움직임. 파도 거품과 함께 하얗게 부서지는 물보라.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안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타인의 삶, 아름다운 물건과 장소에는 관심이 많았음에도, 정작 내 인생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깊게 고민해본 적도 많지 않다. 대학 전공을 영문학으로 선택한 이유는 단지 영어 과목의 수능 성적이 제일 높았기 때문이었으며, 첫 회사는 트렌디하고 소위 ‘있어 보이는’ 분야라서 입사했다. 어딘가에서 들은 말을 내 의견인 것처럼 떠들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했다. 남들은 모르는 비밀을 나만 안다며 젠 체했던 것이다. 정작 나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 채.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어디로 가야할 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아마 평생 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나의 모습은 시시각각, 조금씩 변해간다. 그렇기에 변해가는 모습을 기억할 사람은 나 뿐이다. 그렇기에 나를 기록해보기로 마음 먹었다. 이제부터는 나를 알아가려는 노력을 조금씩 해보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