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도 나무도 아닌 대나무 문화코드

대나무의 운명공동체-2

by 허영회

우리나라 지폐 도안에 대나무가 있을까요? 있다면 값이 얼마일까요? 성인 대상 숲해설에서 소나무 대나무 매화 앞에서 가끔 하는 질문입니다. 네, 송죽매가 다 있답니다. 나라의 얼굴인 지폐 문양은 그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예술 과학의 집합체입니다. 지폐가 제작될 당시의 모든 역량이 함축적으로 집결한 압축파일인 셈이지요.


송백(松柏)이 생물학적 이웃이라면 송죽(松竹)은 정서적 파트너로 양대 축입니다. 소나무 대나무는 사철 푸른 기상으로 변치 않은 인품에 비유되며 선인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댓잎에 맺힌 이슬 노죽(露竹), 비 내리는 날의 우죽(雨竹), 안갯속의 연죽(煙竹), 바람에 물결치는 풍죽(風竹)등 문인화의 화제와 시제로 즐겼지요. 게다가 세한삼우(歲寒三友) 자격으로, 사군자(四君子) 멤버로 전통문화 깊숙이 박인 대나무. 대나무는 동아시아 온대 냉대를 가르는 기준 식물입니다. 소나무 매화와 더불어 송죽매로 묶여 겨울을 견디는 표상이 되고, 매화 난초 국화와 함께 사군자로 동양의 정신을 품습니다. 풀도 나무도 아닌 모호한 정체성은, 경계를 넘나드는 복합문화의 상징입니다.


대나무의 북방한계선은 영하 3도 한계생장온도가 영하 10도입니다. 국내에 4 속 14종으로 분류하지만 유전 형질과 환경에 따라 크기를 달리하며 자랍니다. 대나무는 일반명사로 본명을 몰라도 문제없이 통하지요. 왕대와 솜대는 1월 평균기온이 -2도인 등온선과 같고 조릿대는 위도 41도인 함북까지 분포합니다. 죽제품으로 쓰임이 많을 때엔 소득작물이란 의미의 대밭으로 불렀는데, 언제부턴가 대숲으로 부릅니다. 기후변화 시대에 이산화탄소 흡수능력에 주목해 보니 일반 나무의 4배라 합니다. 2020년 산림 통계상 죽림의 비율은 0.32% 이중 전남과 경남에 69.2%가 있답니다.


겨울엔 칙칙하던 대숲이 추위가 물러가자마자 생생 빛깔로 돌아섭니다. 오히려 봄이 무르익는 5월엔 생기를 잃습니다. 노랑노랑 색이 변하는 잎이 죽순을 키우면서 몸살 하는 모습을 죽추(竹秋)라 합니다. 음력 5월 13일은 죽취일(竹醉日)로 대나무가 술에 취한다는 날입니다. 이날 대나무를 옮겨 심으면 잘 자란답니다. 대쪽 같은 외골수 강직한 성품을 가진 대나무에 인성을 부여해 일탈의 날을 준 것이 재미납니다. 한결같이 곧은

삶은 재미없기에 변화를 준 것이겠지요. 아니면 지조 높은 대나무를 옮겨 심은 것에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취했다고 한 것일까요?


이야기의 보물 창고 삼국유사에 대나무 이야기 세 가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비밀을 대숲 구덩이를 파고 외친 후 일어나는 설화가 있지요. 경문왕의 당나귀 귀는 사이버 세상에 '00 옆 대나무숲'으로 부활해 답답함과 억울함의 배설구 기능을 합니다. 삼국 통일 후 민심을 통합해 안정을 꾀하려 했던 호국사상을 담은 만파식적(萬波息笛) 이야기를 진짜로 믿었던 적도 있습니다. 죽은 신라 문무왕이 해룡이 되어 동해의 한 섬에 대나무를 보냈습니다. 아들 신문왕이 그 대나무를 베어 피리를 부니 나라의 만 가지 근심 걱정이 해결되었다지요.

세 번째는 죽현릉(竹峴陵) 이야기. 신라군이 적군에 밀릴 때 홀연히 나타난 원병, 댓잎을 귀에 꽂은 군사들이 적을 물리치고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주변을 살피니 미추왕릉에 댓잎이 수북하게 쌓여있었답니다. 미추왕릉의 죽엽군(竹葉軍) 이야기는 납량물 느낌이었죠.


대나무류 맏형이라 할 만큼 큰 맹종죽은 왕대보다 굵게 자랍니다. 왕대나 솜대에 비해 비교적 일찍 죽순이 나옵니다. 대나무는 땅속줄기에서 복제를 한 죽순으로 번식합니다. 맹종죽(孟宗竹)의 죽순에 얽힌 이야기가 있답니다. 병이 깊은 어머니가 죽순이 먹고 싶다는 소원에 맹종은 대나무밭에서 죽순을 찾습니다. 눈 덮인 겨울에 죽순이 있을 리 없으니, 슬피 울자 눈물방울이 떨어진 눈 속에서 죽순이 돋아났답니다. 하필이면 죽순을 먹고 싶다고 했을까요? 죽순의 쫄깃한 식감은 고기 씹는 맛을 내니, 집안 형편상 고기 대신 죽순을 택했겠지요?

대나무는 인류 문명에도 기여했습니다. 1000도의 고온에서 구운 대나무숯이 에디슨의 백열등에 필라멘트로 사용되었습니다. 1879년 인류가 두 번째로 발견한 불이 되어 40시간을 밝혀주었으니까요. 오늘날엔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 주목받는 바이오소재이기도 합니다. 플라스틱에 밀려났던 유용성이 어떤 모습으로 귀환할지 기대됩니다. 탈취제, 항균, 건강생활용품으로 다시 뜨고, 미래 산업과 생태 전환을 이끄는 생물자원으로 변신하고 있습니다.


풀도 아니고 나무도 아닌 대나무, 그 애매한 정체성은 식물학적 분류를 넘어선 상징이 됩니다. 경계에 선 식물 대나무는 이질적인 것들도 무리 없이 융합합니다. 정체성을 규정할 수 없기에 오히려 더 넓게 연결되고, 더 깊이 상징되는 유연함이 있습니다. 죽마가 유년의 아이콘이라면 대지팡이는 노년을, 죽편은 서당의 표상이고 죽비는 선방의 상징물이며, 신장대는 접신하는 무속의 표시입니다. 유불선을 넘나들며 경계 없는 상징물로 쓰입니다. 굿판에서 신장대는 강신의 도구가 되어 이승과 저승의 접속을 시도합니다. 대나무를 꽂아놓은 점집에 오늘날에도 신이 오르내리고 있을까요?

20250312_114745.jpg

고립과 공존의 낯선 조합을 어쩌란 말이냐!

소나무는 느리지만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고

대나무는 빠르게 자라며 세대를 이어가는 서로 다른 시간의 결

20250312_115441.jpg

살아남아서 대나무를 닮은 아까시나무

경쟁의 속성을 온몸으로 말해줘

20250312_115219.jpg

속이 빈 줄기를 지탱하기 위해 아래쪽이 촘촘한 마디

무게를 견디기 위해 마디 위치에 따라 달라져

20250729_210431.jpg

지면에 죽순이 나오면 초고속으로 자라

매끄럽고 반질거리는 죽순 껍질 안쪽은 새활용 욕구를 자극해

실제로 생필품을 만들어 썼다고


BandPhoto_2025_07_29_20_46_49.jpg

러시아인형 마트료시카처럼 포개진 내부

자랄 땐 쭉쭉 뽑히는 가제트 팔이 되어

BandPhoto_2025_07_29_20_46_32.jpg

강직해서 대쪽같이 쪼개지기도 하지만

속이 비었으니 유연성 탄력성이 좋아

keyword
작가의 이전글대나무꽃을 보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