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된 소나무 솔방울 많은 이유

소나무의 정체성 -1

by 허영회

솔방울이 청청하게 여무는 때입니다. 달걀 만 한 녹색 솔방울이 어찌나 단단한지 잘라보려 해도 칼끝을 튕겨 냅니다. 어떻게 품은 씨앗인데 호락호락할까! 지난봄에 꽃가루를 붙든 후 1년을 죽은 듯이 기다렸으니까요. 올봄에야 수정되어 성장 트랙에 들어섰으니 달리기만 하면 됩니다. 뙤약볕과 빗줄기가 교대하는 여름은 스피드를 올리기 좋은 시간. 꽃가루가 암술에 묻고 수정이 되기까지 무려 일 년 넘게 걸린 긴 신혼 여행길을 인내한 덕분입니다. 솔방울이 갈색으로 변하기까지 땡볕을 빨며 기다리면 됩니다. 다 익은 어느 맑은 날 솔씨의 여행을 꿈꾸면서.


솔방울은 숲해설가들의 만능열쇠입니다. 이동 중이든 자투리 시간이든, 재미를 불러오는 변신 소품이니까요. 소나무 없는 공원이나 숲은 없기에 언제든 놀이 도구로 줍기만 하면 됩니다. 유아부터 어른까지 수준 맞게 얼마든지 즐길 수 있지요. 축구 야구 농구 골프 같은 공으로 하는 게임을 변형해서 솔방울로 대신합니다. 구가 아니라 달걀 모양이라서 오히려 더 재미있어지지요. 솔방울 똥 싸기, 위로 던져 손뼉 치고 받기, 골대를 정해 발로 차 넣기, 목표물 맞히기, 멀리 던지기 같이 혼자 하는 놀이에다, 마음 맞춰 솔방울 옮기기 같은 팀 플레이, 미술활동의 단골 소재이기도 합니다. 솔방울이 떨어진 시기에 따라 질감과 양감, 크기와 색깔도 다르니까요. 솔방울을 물에 적셔 30분쯤 후에 실편이 오므라들면 꽃과 풀을 꽂아 솔방울 부케 꾸미기도 합니다. 솔방울을 이용해 만든 작품은 자연 예술로 날개 달기도 하지요.


솔방울이 되려면 먼저 꽃이 피어야겠지요. 식물학에서 소나무는 겉씨식물이라 속씨식물에 사용하는 꽃이라는 용어가 맞지 않습니다. 암꽃을 암구화수 수꽃을 수구화수로 부른다지만 그건 전문가들의 용어이고 우리는 그냥 암꽃 수꽃으로 부르지요. 소나무의 수꽃이 퍼뜨리는 꽃가루를 송홧가루 또는 송화라 합니다. 그 옛날 송화는 불로장생의 선약으로, 송화다식은 풍류를 즐기는 기호 음식이기도 했지요.

산자락 자락마다 송화가 피고, 청솔 바람 가득 안고 송화가 피고, 누이의 살결 같은 송화가 핀다는 임홍재 님의 '송화 필 무렵'은 슬프고 배고픈 시입니다.

송홧가루 날리는/외딴 봉우리//산지기 외딴집/눈먼 처녀가 듣는 ‘윤사월’의 꾀꼬리 소리에 공감하거나 이미지를 그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바람 부는 날 산골짝으로 연기처럼 안개처럼 꽃가루가 날리기도 합니다. 산림녹화의 성공으로 성목이 된 나무들이 앞으로 쏟아낼 꽃가루는 점점 더 늘어나겠지요. 흙과 친화적으로 자란 나이 든 세대는 꽃가루 알레르기를 앓는 사람이 드뭅니다. 하지만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는 이들은 괴로운 봄철을 보내야 합니다. 번쩍이는 자동차 외관에 신경 쓰거나, 실내로 날아든 꽃가루를 비위생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송화(松花)가 아니라 직설적인 소나무 꽃가루로 부릅니다.

소나무도 봄빛은 저버리지 않으려고/마지못해 담황색 꽃을 피웠도다/우습구나 곧은 마음도 때론 흔들려서/남을 위해 금분으로 단장 하누나

이규보의 한시 '송화(松花)'가 더 진하게 와닿기도 하겠지요. 송홧가루 서정도 쓰임도 이제는 유물일 뿐, 도시에서 자란 이들에겐 귀찮고 괴로운 연례행사를 치르듯 봄을 보내야 할까요?


못된 소나무 솔방울 많이 매단다는 속담 들어보셨지요? 소나무가 그렇게나 많은 꽃가루를 만드는 이유가 뭘까요? 꽃은 자손을 만들기 위해 피는데 나무는 두 경우에 꽃이 많습니다. 보통 생의 절정기를 꽃에 비유하듯 청춘기의 에너지 넘칠 때입니다. 주변 환경이 좋고 나무의 컨디션도 최상이면 풍성하게 꽃 피우죠. 또 다른 이유는 위기를 감지했을 때입니다. 죽음을 예감한 소나무는 필사적으로 솔방울 만들어냅니다. 죽기 전 자신의 유전자를 최대한 많이 남기려 진력을 다하지요. 초췌한 나무가 잔뜩 솔방울을 매단 모습은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왜 어디가 안 좋았을까? 기온 변화에 과부하가 걸려서? 기후변화로 50년 후쯤에 남한에서 소나무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그러잖아도 활엽수와 경쟁에서 밀려 상등성이로 척박한 곳으로 쫓겨나고 있지요.

소나무는 생존과 번식 욕심으로 많은 꽃가루를 만듭니다. 그늘에서 살 수 없는 해바라기형 소나무는 태양 에너지를 꽃가루로 탈바꿈시켜 생태계 내 물질을 순환시킵니다. 꽃가루는 다른 생명체의 먹이가 되고 흙으로 돌아가 다시 소나무를 키우는 선순환을 촉매 하는 선물입니다. 봄 한철 꽃가루 때문에 불편한 문제는 우리의 대처 방법에 따라 달리 볼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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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수꽃차례와 타원형 꽃봉오리 하나에 10만 개의 꽃가루

소나무 종류에 따라 꽃가루 익는 시기가 조금씩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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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부는 날 연기처럼 이동하는 송홧가루

황사 미세먼지와 결합해 먼지 폭탄 투하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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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색 암꽃은 꽃가루를 붙잡기 쉽게 꼭대기에 배치

아래쪽 수꽃은 꽃가루가 다 나가고 껍질만 남아

맨 아래엔 지난해 수분된 솔방울이 영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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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봄의 암꽃은 미니 솔방울 형태로 겨울을 나고

녹색 솔방울은 실편을 단단히 여미고 씨앗을 키우는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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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솔방울을 총총히 매단 소나무

2025년 미라처럼 제자리를 지키는 유령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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