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해설가가 읽은『할매』
2025년 12월 12일 출간한 따끈따끈한 책, 황석영 장편소설 『할매』를 선물 받았습니다. 숲해설가가 읽으면 좋겠다면서, 개똥지빠귀 사체에서 싹튼 팽나무가 600년을 살며 지켜본 인간 세상 이야기랍니다. 바다를 배경으로 물에 잠긴 나목의 표지와 '할매'라는 제목이 묘하게 어울립니다. 책을 열기도 전에 마음이 먼저 기울었지요. “인간의 시대를 넘어 생명의 시대로” 띠지 문구는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이 소설은, 군산의 오래된 포구마을 팽나무에서 출발합니다. 인간을 중심에 두는 기존 서사의 궤도를 벗어나, 생명 전체의 시간으로 시선을 확장한 작품입니다. 인간이 나무와 새, 갯벌과 바다로 이루어진 거대한 생명 순환의 일부로 등장합니다. 숲해설가인 제게 가장 먼저 와닿은 것은 역시 생태의 언어였습니다.
소설은 팽나무 발아 시점을 기준으로 11장이 모자이크처럼 펼쳐집니다. 초반부는 겨울철새 개똥지빠귀 생태와 죽은 개똥지빠귀의 뱃속 씨에서 싹튼 팽나무 주변의 200년 자연을 보여줍니다. 250년쯤 흐른 뒤, 비로소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몽각'스님이 고목 팽나무 열매를 맛보고 씨를 땅에 묻어 싹이 트고 자라나자 "할매, 이것이 당신 자식이라오. 내가 키웠어요." 섬에서 혼자 살던 스님은 자연에서 깨달음을 얻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이후 하제 마을이 형성되고, 400살 무렵 팽나무는 '할매 서낭님'이 되어 마을 사람들을 지켜봅니다. 천주교와 동학, 일제 강점기를 거쳐 이야기는 훌쩍 1970년대로 건너뜁니다. 하제 마을 사람들의 후손들은 환경운동가가 되어 갯벌과 나무를 지키는 싸움에 나섭니다. 인간의 역사는 자연의 긴 호흡에 비해 얼마나 짧은지, 소설 속 시간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집니다.
책을 덮고도 오래 남는 장면이 있습니다. 죽음을 예감한 몽각 스님이 갯벌로 들어가, 그동안 자신을 먹여 살렸던 생물에게 자신의 몸을 보시합니다. 칠게가 시신을 분해하고, 번성한 칠게를 도요새가 포식합니다. 생태계의 냉엄한 자연 섭리에 동참한 인간!
또 하나는 환경운동가 배동수가 말한 '갯벌의 대합창'입니다. 보름날 밤, 갯벌 구멍마다 생명들이 내는 소리. 경험하지 않고서는 상상할 수 없는 세계라고 말합니다. 새만금방조제 물막이 공사를 반대하며 삼보일배로 걷는 길 위에서, 개발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수많은 주검들을 봅니다. 개발의 이익은 숫자로 환산되지만, 보존의 가치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개발을 종종 발전으로 믿지요.
소설은 팽나무의 시간을 기준으로 펼쳐지는 만큼 나무에 관심이 갑니다. 나무도 생물학적으로 건강하게 살 수 있는 한계수명인 '임계 수령(臨界樹齡)'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팽나무의 '임계 수령'을 약 500년 내외로 봅니다. 300~500년 정도 되면 나무속(심재)이 썩어 비어 가는 '공동화 현상'이 심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계를 넘긴 '슈퍼 할매나무'가 존재합니다. 이 소설의 모델인 팽나무는 국내 최고령 팽나무로 공식 인정을 받았습니다. 2020년 나무에 구멍을 내어 나이테를 직접 확인하는 '생장추' 검사 결과 537(+-50) 년으로 측정되었습니다. 그리고 2024년 10월 31일 천연기념물 580호로 지정되었지요. 지금은 군사시설 확장으로 마을은 사라지고 나무만 남아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오래된 나무를 왜 ‘할매나무’라 불렀을까요? ‘할배나무’는 단독으로 쓰이기보다 할매나무와 짝을 이루거나, 은행나무처럼 수나무일 경우에 부릅니다. 이는 대지를 어머니에 비유하고, 씨앗을 맺어 생명을 길러내는 존재를 여성으로 상징하는 전통 신앙과 정서 때문입니다. 마을의 신령을 ‘할머니’로 모신 것도 가정을 돌보는 안방마님처럼 마을의 안녕을 세심히 지켜 달라는 뜻이겠지요. 노거수를 할매나무 혹은 할배나무라 부른 것은 마을을 지켜주는 살아 있는 어르신으로 존중했던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현대 생태학의 '마더 트리(Mother Tree)'이론은, 캐나다의 수잔 시마드 교수가 30여 년 연구 끝에 정립했습니다. 숲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가 어머니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뿌리와 균근(곰팡이) 네트워크인 '우드 와이드 웹(Wood Wide Web)'으로 연결된 어린 나무들에게 영양분을 나눠주고 위험신호를 보낸답니다. 탄소동위원소를 사용해 자작나무와 미송 사이에서 영양분이 실제로 이동하는 경로를 추적하여 나무들이 서로 '거래'하고 '양육'한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서구의 과학자가 명명한 '마더 트리'가 과학의 언어라면, '할매나무'는 생활의 언어입니다. 마더 트리가 생태계의 중심 허브라면 할매나무는 마을 공동체의 수호신입니다. 이름은 달라도 역할은 닮았습니다.
현장에서 나무를 읽어온 숲해설가로서 노거수는 경이의 대상입니다. 나무 해설에 종종 사람이야기를 덧붙입니다. 손자가 있으니 이름도 할머니이고, 몸도 할머니입니다. 그러나 나는 할매나무 같은 할머니일까. 내가 있는 자리에서 주변을 살리는 존재로 나이 들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젊음이 흉내 낼 수 없는 깊이를 어떻게 길러갈 것인가. 『할매』는 한 그루의 나무가 한 사람의 노년에 그 질문을 건넵니다.
낙동강변 옛 동원진나루터의 팽나무와 은행나무
부산시 북구 금곡동 사거리 보호수 팽나무
220+46=266세로 건강한 편(1980년에 지정)
껍질이 벗겨지기보다 혹을 매다는 둥치(26.1.12일)
가을과 겨울의 팽나무 열매
사월에 피는 팽나무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