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택한 꽃, 동백

by 허영회

동백꽃을 처음 보고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동백꽃을 다룬 문학과 노래가 먼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성인이 된 내 감정보다 그들의 시선이 눈앞을 가렸다고 할까요. 뒤마의 ‘춘희’처럼 요염하지도 않고, 이미자의 ‘동백아가씨’처럼 멍이 들어 보이지도 않는데. 그러다 김유정의 단편소설 '동백꽃'까지 떠올렸습니다. 마지막 장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푹 파묻혀'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내음새' 를 맞는다고 동백꽃에 코를 박고 벌름거리기까지 했지요.


숲해설가가 되고서 나름의 합리화를 시도했습니다. ‘노란 동백꽃’은 노란 수술로 끼워 맞추었는데, 알싸한 향기에는 도무지 연결이 안 됩니다. 향기가 없는데 정신이 아득했다고? 빨강 꽃잎을 두고 굳이 수술을? 이상하고 이해불가한 ‘동백꽃’이라며 툴툴거리던 중, 강원도 방언에서 생강나무가 동백꽃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유레카! 궁금증이 단번에 풀렸고, 동네방네 소문을 냈습니다.

동료 숲해설가샘이 퇴직교사 대상 해설에서 김유정의 ‘동백꽃’ 질문을 받았답니다. 고급 헤어제품이던 동백기름이 귀하던 강원도에서, 생강나무 기름을 대신 쓰면서 붙은 이름이라고 했답니다. 덕분에 최고의 유능한 해설가 칭찬을 받았답니다. 그때는 AI가 없었을 때지요.


겨울에 피는 꽃이라고 동백(冬栢/柏). 남국의 정열을 품은 동백나무는 우리나라가 생육의 북한계선입니다. 하지만 개량 품종과 기후 온난화로 중부내륙까지 분포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도서 해안지방에 자생하는 토종 동백 잎은 두툼하고 왁스층 광택이 있어 든든한 일꾼처럼 보입니다. 강한 햇살을 반사해 조엽수라 불리고, 병충해 방지용 갑옷으로 빗물을 빨리 미끄러지게 하며 낙엽수 잎보다 두 배로 길게 사용하지요. 잎에 들인 에너지가 많은 만큼 쓰임도 다양합니다. 두꺼운 잎은 수분함량이 높아 남도 절집 주변에서 방화수 역할을 합니다. 잎은 매염제나 모기향으로 쓰이고, 꽃잎은 화전으로 부쳐 먹고, 씨앗은 기름을 짜 머리를 단장하고, 단단한 목재는 악기나 농기구를 만든답니다. 윤기 나는 잎새가 부유해 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부자의 곳간처럼 인심도 넉넉한 나무입니다.


비용이 많이 드는 빨강 꽃잎, 그것도 겨울에 피는 꽃.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극적입니다. 반질거리는 초록 잎과 붉은 꽃의 선명한 보색 대비는 이질적이면서 강렬합니다. 여기에 눈까지 내리면 누구든 시인이 되지 않을 수 없지요. 그래서 동백꽃은 문학 속에서 화려하게 재탄생합니다. 유치환의 목 놓아 울던 청춘의 피꽃, 김용택 시인의 선운사 뒤안에서 엉엉 울게 만든 붉은 동백, 가장 눈부신 순간에 스스로 목을 꺾는 참수를 보며 붉은 감탄사 하나를 허공에 긋는 문정희의 동백까지. 하필 왜 겨울이냐며 슬퍼하다가, 너로 인해 겨울이 쨍하게 아름다우니 고마운 내 마음도 보탭니다.


길가에 애기동백이 한창입니다. 잎이 작고 뒷면에 솜털이 있어 애기동백이랍니다. 영하의 날씨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들이 뛰놀 듯 꽃을 달고 있습니다. 가지치기를 하지 않은 나무에서 흐드러지게 달린 붉은 꽃은 겨울장미 같습니다. 아름다움을 장미에 비유한다면, 애기동백은 활짝 핀 겨울장미라 불러도 좋겠습니다. 다만 둥글게 다듬어진 나무에 꽃을 빼곡 박은 듯한 인위적인 모습은 아쉽습니다. 새에게 잘 보이려고 붉게 피는 꽃 속에다 꿀도 푸짐하게 담아 동박새를 기다립니다. 부산시의 상징 꽃은 동백이지만, 현실에선 애기동백이 훨씬 자주 눈에 띕니다.


애기동백은 자생 동백보다 꽃이 빨라 이르면 10월부터 피기도 합니다. 동백보다 큰 꽃을 풍성하게 달아 시선을 붙드는 꽃입니다. 전정에 강해 모양을 내기 쉬워 길옆이나 아파트 단지 조경수로 대량 식재되었습니다. 토종 동백은 5장의 꽃이 반쯤 버는데, 일본 원산의 애기동백은 원예종으로 개량되어 색과 크기 홑꽃과 겹꽃잎 등 다양합니다. 국명은 애기동백이지만 산다화로 부르기도 하죠. 애기동백 학명이 Camellia sasanqua로, 산다화는 일본 사산카 발음에서 유래했다거나, 중국에서 일반 동백을 산다화(山茶花)로 부른 영향이라고도 합니다. 우리의 옛 문헌 <양화소록>이나 한시에 나오는 산다화. ‘겨울에 피는 차나무 꽃’이란 뜻의 서정적 의미로 쓰였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로는 김소월의 시 “산유화(山有花) 덕분에 어감이 더 정겹게 느껴집니다.


다시 묻게 됩니다. 동백은 왜 겨울을 택했을까 하고. 굳이 동백과 애기동백을 나눌 필요는 없겠습니다. 차갑고 고단한 계절 한복판에서 가장 선명한 색으로 피는 꽃이니까요. 잎은 초록을 놓지 않고, 꽃은 불리한 시간을 피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가장 빛나는 때를 아는 꽃. 우리 삶에 불쑥 찾아오는 겨울, 버티는 것으로도 버거운 날은 동백꽃을 떠올려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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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게 둔 애기동백은 겨울 장미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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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양내기 관리를 받는 애기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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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빛은 무엇이든 상큼하게 띄워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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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이 반만 버는 토종 동백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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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눈으로도 보이는 애기동백의 꿀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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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서 땅에서 두 번 피는 애기동백과 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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