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동안 잊고 지냈던 필사노트를 꺼냈다. 양장 표지 위에 뽀얀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손바닥으로 슥슥 닦아내고, 책장을 펼치자 삐뚤빼뚤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으이구, 글씨체 봐.’ 혼자 피식 웃다가 문득 멈췄다.
“나는 어쩌다 이 노트를 멈춰둔 걸까?”
한때 나의 아침은 늘 같은 루틴으로 시작됐다. 눈을 뜨면 스트레칭을 하고, 처방받은 약을 챙겨 먹고,
책상 위에 키보드를 밀어둔 채 노트를 펼쳐 필사를 했다.
활자 하나하나를 옮겨 적으며 ‘아, 이렇게라도 내가 하루를 시작하고 있구나’ 안심하곤 했다.
필사는 나를 붙잡는 버팀목이었고, 흔들리지 않게 해주는 작은 집중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 루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필사 대신 휴대폰을 잡고, 약을 먹고 컴퓨터 전원을 켜며 ‘오늘 하루쯤은 괜찮겠지.’ 하며 하나둘 빼먹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필사노트는 책상 구석에 방치된 채 잊혀졌다.
단순히 ‘게을러졌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바쁘다는 핑계로, 혹은 마음이 지쳐서,
나는 내 하루의 균형을 스스로 놓아버린 것이다.
삶에는 가끔씩 그렇게 작은 균열이 온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지나가지만, 돌이켜보면 그 균열이 우울감의 틈새가 되기도 한다. 나 역시 그랬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기억과 가슴 시린 아픔이 불쑥 올라올 때면,
방 안을 이리저리 돌며 핸드폰 시계만 수십 번 확인하곤 했다. 자리에 앉아도, 누워도, 숨이 턱턱 막혀왔다.
예전의 나는 그런 순간을 버티지 못해 무너졌고, ‘차라리 끝내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위험한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알게 되었다. 아픔과 불안은 결국 지나간다는 것을.
때로는 한숨 푹 자고 나면 희미해지기도 한다는 것을. 물론 늘 통하는 건 아니다.
자고 일어나도 여전히 불안하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날도 많았다. 지금도 그런 날이 종종 있기도 하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버텨온 건,
내가 ‘나를 잃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노력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어릴 적 나는 세상에 분노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를 잃어도 상관없다.” 그만큼 삶이 버거웠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안다. “나를 잃지 않는 것” 이야말로 세상 앞에서 내가 버틸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을.
사람은 직선으로만 성장하지 않는다. 때로는 같은 자리에서 맴도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나선형으로 조금씩 올라가고 있다. 꽈배기처럼 꼬여 있지만, 분명 한 층 위에 있는 나를 발견한다.
나는 여전히 부족하고, 여전히 쉽게 흔들리지만, 예전의 나보다 단단하다.
허무와 허망으로 가득했던 어린 시절에도 이를 악물고 버텼고, 지금도 여전히 버티고 있다.
그 결과, 비로소 나는 이제야 조금은 나다운 내가 된 것 같다.
노트를 덮으며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고생했다. 그리고 수고했다. 앞으로도 나를 잃지 않도록 계속 수고해 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