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총량의 법칙.

오늘도 6시간.

by Donna

혼자 산지 1달 하고 반이 지났다. 동거하던 집에서 나온 짐을 1차로 옮기고 본가에 남아있는 내 짐까지 2차로 옮기는 게 1주일이 더 걸렸다. 그리고 그 1주일 동안 일을 쓰리잡까지 뛰고, 밤샘 작업을 하며 11월을 그렇게 보냈다. 급변한 나의 환경은 도파민과 같았다. 빨리 진흙탕 같은 곳에서 벗어나 새로운 곳에 적응하는 걸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이별의 아픔도 상실감도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친구들의 집들이 날짜를 미리 정해놓고 그날을 D-day로 삼아 틈틈이 집정리를 했다. 그리고 그 사이 나의 낮과 밤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복잡하게 뒤엉켜진 짐들을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하는지 감이 오질 않았고 여기 정리하려고 하다 보면 저기 정리돼있던 것을 우루루루 끄집어내어 다시 여기에 옮기는 사이 저기는 또 난장판이 되어갔다. 여기와 저기만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거기는 쳐다보지도 않고 여기와 저기를 정리하다 보면 어느새 거기를 또 정리하고 있고, 거기를 정리하다가 여기를 또 보면 한숨이 나옴과 동시에 지쳐서 침대에서 기절해 버렸다.


홀로 이사는 처음 해봐서 모든 게 다 낯설고 두렵고 힘들었다. 집을 알아보는 것도, 계약하는 것도 모두 혼자의 힘으로 처음 하는 것이라 내 심장을 손으로 다독이며 "괜찮아, 할 수 있어. 겁먹지 마, 잘해왔잖아."라고 실제 행동으로 토닥였다. 그게 내가 나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직관적인 위로였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불혹의 나이가 되면 시시때때로 전활 걸 사람이 줄어든다. 전화통을 붙잡고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대화할 사람이 점점 사라진다. 만약 아직까지도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가까운 지인이자 친구이고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사람일 것이다 (물론 성향에 따라 다르지만). 나는 다행히 말이 많은 편이고 통화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친구가 몇 남아있다. 그들도 물론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내 상황을 전적으로 알아주고, 이해해 주고 받아주는 친구들이다. 그래서 길게 통화를 하고 나면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도 알게 되고 그들을 통해 생각도 정리가 되기도 한다. 더군다나 나는 전화 통화를 하며 정리를 하거나 청소하는 것을 좋아하더라. 말없이 하는 것은 손에 잡히질 않았다. 원래도 그런 걸 좋아하는 나 이지만, 이번엔 혼자 있기 때문에 더더욱이 그랬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보통 하루에 대화할 수 있는 총량의 법칙이 있다면 그전에 나는 아마 동거인과 고양이들과의 대화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많이 전화통을 붙잡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통화를 하고 있어도 동거인이 들어오면 전화를 끊거나 다른 방으로 이동을 하거나, 다음 전화는 내가 운전할 때 하거나 했었다.


어젯밤에는 OTT에 볼 만한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찾다가 지쳐 아마도 새벽 3시쯤에 잠이 든 것 같다. 그리고 오늘 오전 11시 반에 눈이 떠졌다. 그리고 침대에 누운 상태로 인스타그램에 릴스를 계속 내리고, 스토리를 계속 보고, 뭔가를 쉼 없이 계속 보기만 했다. 2시간 정도 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무심코 친구 A에게 전활 걸었다. 이렇게 하릴없이 인스타그램을 하고 있는 내가 한심해서 전화했다고 했다. 친구 A는 토요일이니 쿨하게 그런 날도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난 이번 주가 나에게 매일 토요일 같았기 때문에 그 말이 나와는 좀 맞지 않았다 생각했다. 고로 나는 내가 한심하다는 것이 맞았다. 통화를 하며 설거지를 했고 점심을 준비했고 이불을 세탁기에 돌렸다. 그러다 이렇게 1시간 넘게 전화를 할 바에야 친구 A를 만나러 가는 것이 낫겠다 싶어 빨래를 마치면 친구의 동네로 가겠다 하고 통화를 끊었다. 그리고 잠시 후 연락이 다시 와서는 그 친구 A가 영화를 보러 가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영화 티켓을 급히 알아보다 맘에 드는 자리가 없어 그 약속은 내일로 미루고 나는 다른 지방에 있는 친구 B에게 전활 걸었다. 안부 인사 겸 겸사겸사 근황까지 듣는데 오랜만에 한 통화라 1시간 20분 정도가 돼서야 통화가 끝났다. 나는 그 사이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았던 옷가지들이 걸린 행거를 이렇게 저렇게 위치를 바꿔갔다. 그리고 통화가 끝남과 동시에 나는 힘이 푹 하고 풀려버렸다. 동시에 가장 나약했던 요즘의 나와 전화 통화를 많이 한 친구 C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근의 나는 이별도 이별이고, 상실감도 상실감이지만 무엇보다 그런 상태이기 때문에 잘 유지된 관계들도 진절머리가 나는 거 같다. 그래도 친하다고 생각했던 사람, 오랜 시간 내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의 무심함이 정말 화가 솟구칠 만큼 싫다. 이건 내 과거의 트라우마 하고도 관련 있다. 30대 초반에 한 남자친구와 동거를 하다 헤어졌는데 이 또한 아무런 전조증상 없이 받은 이별통보였기 때문에 내 존재 자체가 무너져버렸었다. 나는 그게 공황장애인지도 모르고 모아놨던 돈을 모조리 택시비로 날렸고, 거기서 조금 남은 돈으로 운전면허를 따고 중고 오토바이를 샀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은 이별에 아파 무너진 나를 보며 고작 하는 말이


"언제까지 사랑타령 할 거니, 오토바이는 무슨 생각으로 샀니, 네가 고등학생이니? "


이렇게 말한 친구 중 하나는 야간업소를 다니며 일을 하다가 반듯해 보이는 남자를 만나 막 결혼해서 출산을 한 상태였고, 또 한 친구는 돈을 너무너무 좋아해서 사기꾼 같은 돈 많은 남자친구를 뒀었기 때문에 공감이라고는 없었다(그리고 몇 년 뒤 진짜 사기꾼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그 친구 명의로 몇 억을 가로채 감옥에 갔다고 들었다). 친구들이 돈이 많은 집안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쓰는 만큼의 돈은 어려서부터 없었다. 그래서 그녀들이 생일이라고 주는 생일 선물이나 지나가다 어울릴 것 같다고 해서 산 것들을 주는 자리에서는 참 뻘쭘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나에게 돈을 바라고 자기들이 쓰는 만큼 나에게 지불하라고 한 적은 없다. 그런데 나는 없기 때문에 더 마음을 다해 대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룻밤의 실수로 병원에 가야 할 일이 생겼을 때 함께 가주었고,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게 이 친구 중 하나는 20대 초반에 남자친구의 실수로 임신을 했지만 결국 그 아이는 유산되었다. 친구는 너무 슬퍼했고 나는 어디서 본 건 있어서 천도재를 해주자 했다. 가짜였지만 마음을 다해 편지를 썼고 그걸 아파트 어딘가에서 태웠던 기억이 난다. 그냥 나는 그런 것들이 어려서부터 몸에 배어있다. 집도 힘들었지만 예술가는 언제나 여유롭지 않은 상태고 아무리 열심히 해서 돈을 벌어도 직장인만큼의 돈벌이가 되지 않으니 항상 없었다. 그래서 뭔가 나도 해주고 싶은데 그게 여건상 안될 때마다 나는 내 마음과 정성과 튼튼한 육체로 어떻게든 상대의 마음을 위로하려 했다. 그런데 내가 위로가 필요할 땐 내가 한 만큼의 위로가 돌아오지 않았다. 되려 다가오는 말은 "네가 다른 사람에 비해 공감능력이 높아서 그래. 그런 걸 서운해하지 마." 라던가 "그럴 줄 알았으면 만나지 말았어야지. " 라던가 "그건 네가 하고 싶어서 했던 거 아냐? " 라던가 "네가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어서 그래."였다. 내가 만약 그 순간에 정신과 진료를 받으며 상담을 받았더라면 그렇게 감정소모를 하지 않았을 텐데 고작 돌아온다는 위로가 그런 말이라는 걸 알았을 때 내 마음은 너무 공허했다. 그리고 난 이 친구들을 모두 손절했다. 공허함은 사실 이 친구들 뿐 아니라 가족에게도 느꼈던 감정이며 며칠 전 대차게 탈퇴한 그 모임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탈퇴한 모임에 대한 이야기를 친구 C에게 통화하며 1시간 반을 썼다.


친구 C는 전시 준비를 하느라 상당히 바쁘다. 그래도 손을 움직이고 있으니 입은 대화할 수 있었다. 서로가 늦은 시간에 나는 정리를 하고 그 친구는 작업을 했기 때문에 편안하게 몇 시간이고 통화할 수 있었다. 근데 요즘의 나는 혼자서 그저 지내는 법을 적응하려고 애쓰는데 나는 아직 온전한 상태가 아니라서 도통 버티기가 쉽지 않았다. 어떻게든 전화하지 말아 봐야지, 오늘은 진짜 잘 버텨봐야지 하는데도 상대를 바꿔갈 뿐이었다. 오늘도 나는 친구 C를 붙잡고 통화를 하다 친구 C는 내 이야기에 급 흥분하여 대화를 하다 전화를 끊었다. 한참 통화를 하는 것은 즐겁지만 끊을 때쯤 되면 나는 얘기를 들어줘서 고맙다 말한다. 덕분에 생각이 정리돼서 고맙다고. 그리고 또 다짐한다.


" 내가 지금 온전한 상태가 아니니 핸드폰과 좀 멀리 있어야 해.

인스타그램 하고도 멀어져야 해. 전화도 많이 하지 말고

스토리도 많이 올리지 마.

과묵하게 있어야 해.

이제 네 응석을 받아줄 사람들은 없어. "


새해맞이 플라멩코 수업이나 빨리 개강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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