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공간을 지키는 일
에밀 아자르의 소설 <자기 앞의 생>. 주인공 모모는 자신을 키워주는 로자 아줌마의 지하실을 발견한다. 매춘부 출신의 중년 여성 로자는 유태인으로, 나치 홀로코스트의 광기 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녀는 한밤중 과거의 트라우마에 사로잡힌다. 그럴 때면 낡은 소파 하나만 놓인 어둡고 습한 지하실에 내려가 평온을 찾는다. 로자 아줌마는 모모에게 지하실을 "내 유태인 둥지"라고 고백한다.
도리스 레싱의 소설 <19호실로 가다>에도 비슷한 공간이 묘사된다. 평생 가정주부로서 살아온 롤링스 부인. 그녀는 남편에게 자신만의 방 하나를 갖는 것이 소원이라 말한다. 남편은 집 한켠의 공간을 내어주지만, 얼마 가지않아 그곳도 가족을 위한 공동의 공간으로 변질된다. 결국 롤링스 부인은 은밀히 낡은 호텔의 방 하나를 빌린다. 19호실이다. 19호실 속 부인은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온전한 혼자의 시간을 누릴뿐. 남편에게 19호실의 존재를 발각당하고 이유를 추궁받는다. 부인은 그곳에서 외도를 해왔다고 거짓말한다. 그렇게 자기만의 공간을 지킨다.
일과 사생활을 특별히 구분짓지 않는다. 직원들에게도 말한다. 필요하다면 때와 장소 상관없이, 주저하지 말고 연락달라고. 상사에게도 마찬가지로 행동한다. 업무의 효율성, 안정성을 위해서는 퇴근 후 저녁과 휴일에 기꺼이 일을 섞는다. 그러나 용납할 수 없는 한 부분이 있다. 점심시간이다. 그 한시간, 나는 업무미팅을 위한 식사는 물론 직원들과도 섞이는 것을 꺼린다. 혼자 음식을 입에 집어넣거나, 식사를 거르고 책이나 뉴스를 읽는다. 누구든 점심시간을 침범하고자 하면 내 속에서는 강한 저항감이 꿈틀댄다. 로자 아줌마나 롤링스 부인의 독립성이 지하실과 19호실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의해 지지받았다면, 나는 그것을 특정한 시간으로 지키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문득 생각이 든다. 나만의 19호실은 평일 점심시간이지만, 타인들은 다른 시간 다른 공간일 것이라고. 그들의 19호실은 퇴근 후 저녁시간이며 휴일일 것이라는 생각. 그렇다면 나는 타인의 19호실을 무수히 침범해오지 않았을까. 생존을 위한 호흡과 존엄을 위한 호흡은 다르다. 우리는 하루 8시간, 직장에서 생존을 위해 가쁘게 호흡한다. 그리고 나머지의 시간은 자신의 존엄을 위해 호흡하고 있을 것이다. 타인의 존엄을 위한 호흡에 내 생존을 위한 호흡을 섞는 것, 경계해야 한다.
나는 나만의 지하실을, 19호실을 지켜내고 있을까. 지켜내고 있더라도 누군가의 그곳을 침범하고 있지는 않을까. 나 또는 누군가는 침범받는 괴로움을 버텨내며 살고 있지는 않을까. 자성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