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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립 Nov 25. 2020

아빠의 휴대폰 메모장

또 하나의 기억 거리가 생기다.

나는 휴대폰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휴대폰에 메모하는 습관을 가졌다. 해야 할 숙제나 챙길 준비물 등을 바탕화면 문구로 적어놨다. 스마트폰으로 바꾸고 나서는 메모장에 해야 할 것, 사야 할 것 등을 적었다. 지금은 문득문득 떠오르는 글감들도 적는다.




어느 날, 아빠의 휴대폰을 보다가 메모장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스크롤을 내려도 끝이 없는 아빠의 일기가 쓰여 있었다. 나의 메모장과는 쓰임새가 달랐지만, 메모하는 습관은 아빠를 닮았던 것이었다.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빠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적혀있었다. 시간은 거의 12시 반쯤, 아빠가 회사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쉴 때 적은 것이었다.


회사에서 겪은 서러운 일, 아빠의 형제와 통화했던 일, 부부싸움하고 나서 쓴 아빠의 감정, 주말에 산 정상에 올라 적은 아빠의 감정, 아내와 자식에게 전하고 싶은 편지 등이었다. 아빠는 메모를 적으면서 아주 다양한 생각을 하셨을 것이다. 언제는 기뻤을 것이고, 언제는 슬펐을 것이고, 언제는 화가 났었을 것이다. 오타가 많고, 맞춤법이 틀린 것이 많았지만 메모 안에는 아빠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었는지 나도 알 수 있었다.


사실 아빠는 스마트폰으로 바꾸시고 나서야 타자를 칠 수 있게 되셨다. 내가 가르쳐 드렸었는데, 아빠가 처음 나한테 스스로 문자를 보내신 날이 잊히지 않는다. 큰 검지만을 이용해서 꾹꾹 누르는 것이 짠하기도 하면서 대견한 마음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장문의 메모장을 보고 타자를 가르쳐 드리기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출처 Unsplash

메모장을 다 읽지는 않았다. 내용이 많기도 했고, 계속 읽으면서 아빠한테 너무 죄송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계속 나이가 들어가는데 나는 계속 방황만 하고 있다는 그런 마음 때문에 어리석게도 메모장 읽기를 회피하고 싶었다. 언젠가 내가 뭔가를 이뤘을 때, 조금이라도 삶의 만족을 느낄 때. 그때 다시 아빠의 메모장을 읽고 싶다.


아빠의 메모장이 있다는 걸 안 당시에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건 백업이었다. 언제든지 꺼내 볼 수 있고, 잃어버리지 않도록 저장해 두고 싶었다. 아빠의 메모장에는 글뿐만 아니라 글에 담겨있는, 오타에 담겨있는 아빠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있으니까.



인터넷에서 본 글이 있다. 어색하더라도 부모님의 모습을 영상으로 기록해두라는 거였다. 사진에는 목소리가 담길 수 없으니 영상으로 남기라는 거였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꼭 찍어 놓으라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아버지의 목소리를 바로 생각하지 못해서 한참을 울었다.’는 댓글을 남겼다. 사실 우리 가족은 내가 중학생 때부터 재미로 영상을 찍어왔다. 중학생 때 처음 디지털카메라를 샀기 때문이다. 아빠는 거액을 주고 산 디지털카메라를 그냥 방치해두는 것이 아까워서, 산 이후로 사진이나 동영상을 자주 찍으라고 하셨다.


목소리를 담을 의도로 찍은 건 아니었지만, 그 글을 읽고 나서는 영상 하나를 찍을 때마다 기분이 달랐다. 부모님의 목소리를 잊는 나 자신이 너무 밉겠지만 그 미움을 무릅쓰더라도 부모님의 목소리를 영상을 통해 기억해야 하니까. 또, 영상을 찍는 날은 가족이 화목할 때니까 기분 좋은 부모님의 웃음소리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부모님이 아이가 초등학생 때부터 쓰던 일기장을 엮어서 보관해두듯이, 나도 아버지의 감정이 녹아있는 메모장을 계속 백업해둘 것이다.


부모님이 아이의 순간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동영상과 사진을 찍듯이, 나도 그렇게 부모님이 그때 느낀 감정, 그때 모습, 목소리를 기억하기 위해 또다시 휴대폰을 들 것이다.




https://brunch.co.kr/@solipwriting/46


(타이틀 이미지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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