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인 줄 알았는데 더 깊은 바닥이 있었다
1부 EP09 약의 증량
"박. 근데 우리 같은 개미 중에 알개미 들은 언제까지 개미로 살아야 할까."
"우리? 언제 까지라니. 우리는 평생 개미 신세야."
"?"
"들어봐. 씨드 머니(종잣돈) 있어?"
"아니."
"그럼 앞으로 씨드 머니를 만들 만큼 월급이 많이 나와?"
"아니."
"부모님 땅이나 집 있어?"
"아니."
"거봐."
어느 날 박과 대화하다가 문득 깨닫고 말았다.
나 같은 흙수저는 처음부터 대기업에 들어가서 큰돈을 바짝 벌어서 다른 사업을 하지 않는 이상, 지금 이 상태에서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대한민국의 부동산은 가혹하다. 10년을 꼬박 일하고 저축해도 부모님 집은커녕 내 집 하나 마련할 수 없는 현실. 그래도 기어코 내 집을 가지고 싶다면 억 단위의 집을 대출을 끼고 사서 평생 갚는 현실. 그 현실이 와닿지 않을 만큼 철없던 나는 모으기는커녕 펑펑 쓰면서 살았었는데, 어느 날 이 대화를 통해 깨닫게 돼 버린 것이다. 나는 여기서 더 잘 살게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집'이란 것의 개념에 대해 그리 잘 알지 못했다. 20대일 때는 멋모르고 '집이 없으면 어때? 전세받아서 떠돌이처럼 살면 되지! 오히려 그때그때 다른 장소에서 살 수 있으니 얼마나 새롭고 좋아!'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 자리에서 몇십 년을 사는 것은 너무 답답하고 재미없게 느껴졌다. 물론 이런 성격 덕분에 타지로 옮겨져서 몇 년씩 근무하게 되어도 거부감이 없었지만. 나는 가장 중요한 것을 몰랐던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집이란 것은 '거주'의 의미가 아니라 '자산'의 의미라는 것을. 그래서 직업을 가진 지 10년이 지나도록 자산을 구축하는 걸 생략하고 대신 쓰기 바빴다. 친구들이 하나 둘 결혼하거나 독립해서 자신의 집을 마련할 때 나는 전세 원룸에 살고 있었다. 그걸 보면서도 나는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았다. 10년 뒤, 20년 뒤를 생각하며 개미처럼 열심히 살아가는 친구들을 보면서, 나는 '어차피 오래 살지도 않을 텐데 뭣하러 긴긴 앞날을 생각한단 말인가!'의 마인드만을 되새겼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아파트 대출을 다 갚을 때쯤이면 나는 이미 세상에 없을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홀가분했다.
그러나 정신을 차려 보니, '언제 죽어도 좋아'라는 생각의 결과는 처참했다. 언제 죽어도 상관없기 때문에 엄마에게 보내는 생활비를 제외한 나머지 돈을 흥청망청 썼다. 나에겐 미래가 없었으므로. 돈을 모아 그걸로 뭔가를 할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 나는 아직까지도 살아있었고, 살아갈 것이고, 내려다본 두 손에 남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걸 깨달았을 때의 기분은 생각보다 더욱, 더더욱 비참했다. 지난 10년을 허송세월을 보낸 것만 같았다.
나는 정신과 의사 선생님에게 이 얘기를 했고, 참으려고 했지만 눈물이 쏟아졌다. 기존처럼 일시적으로 확 우울했다가 또 괜찮아졌다가 하는 것과는 달랐다. 현실이 내가 느끼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혹독하고, 그게 바뀌지 않을 거라는 것을 인식하자 나는 바닥의 더 바닥의 더더 바닥으로 떨어졌고 일어날 수가 없었다.
정신과 원장님은 내 상태를 보시더니 약의 용량을 증량해 주셨다.
모양과 색깔이 저마다 다른 알약들. 그 알약들을 먹고 8시부터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