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밤
21
7월
네 번째 밤
처음으로 그의 집을 방문하는 날이다.
그는 외딴 오지로 발령이 나서 매우 힘들어했었는데, 여름방학이 되니 어느 정도 적응했는지 나를 집에 초대했다.
금요일 3시 45분 기차를 탄 후 한 번 갈아타고 나니 얼추 6시쯤 되었다.
기차를 오래 탔더니 피곤하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역에 도착해서 화장실을 갔다 나오니 그 사람이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앞머리가 더 길어서 안경테 때문에 휘어있었다.
마음이 아플 정도로 반갑고, 기뻤다.
자동차 케이를 타고 역이 있던 시내에서 벗어나 그의 학교가 있는 외곽으로 향했다.
아주 찾기 힘든 위치에 그의 아담한 학교가 있었다. 언젠가 혼자 올 수 있을까.
생일날 몰래 와서 선물을 두고 갈 수 있을까. 아마도 정말 힘든 여정이 될 것이다.
집은 그로부터 조금 더 떨어진 곳에 있었다. 3층짜리 붉은색 원룸이었다.
안으로 들어간 그의 집은 거의 우리 집만큼이나 넓었다. 그러나 그 넓은 집 안에 가구나 물건은 거의 없었다.
소박하고, 어찌 보면은 애정이 없었다.
그는 오늘이 오기 며칠 전부터 내게 뭐가 먹고 싶은지를 끈질기게 물어봤었다.
그 모습은 정말 새롭고 신기해서, 나는 도무지 무얼 먹고 싶은지 생각해내지 못했다.
그랬더니 그는 살짝 고민하다가 그러면, 삼겹살을 먹자고 말하곤, 고기를 사놓는다고 했다. 7월의 이 더위에, 삼겹살이라니...
결국 우리는 넓은 방바닥에 신문을 잔뜩 깔고, 그가 학부모에게서 받았다는 김치를 썰고, 야채를 씻고, 밥을 안치고, 고기를 구워 먹었다.
베란다가 무척 크고, 맞바람이 불어 퍽 서늘한 방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우리는 삼겹살 600그램을 딱 맞게 먹어치웠다.
밥을 다 먹고 나서 나는 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온 발바닥에 뭔가가 밟히는 이 지저분한 방바닥을 청소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별로 안 더럽다며 연신 꿍시렁거렸지만 결국 방을 닦는 데 성공했다.
우리는 그가 다운받아왔던 라디오스타를 노트북으로 보며 조금 누워 놀다가 9시쯤 집 바로 옆 운동장을 돌기로 했다.
아주아주 넓은 운동장이었다. 운동장을 천천히 돌면서, 그는 학부모부터 학생 얘기까지, 오만가지 이야기를 다 했다.
나 또한 이제까지 묵혀두었던 이야기들, 즐거운 이야기와 힘든 이야기까지 모조리 털어놓았다.
그에게 고민을 상담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운동을 다하고 들어오니 밤 11시였다.
나는 씻고 그가 만들었다던 율피팩을 했다. 그는 직접 율피팩 파우더로 팩을 만들어서 붓 같은 것으로 내 얼굴에 발라줬다. 맨얼굴을 보인다는 창피함과, 팩을 바르면 더 웃기게 생겼을 거라는 수치심이 가득했지만, 정작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율피팩이 얼마나 좋은지에 대해 연설을 해댔다.
팩을 하고, 우리는 이불 위에 편하게 누워서 해피투게더를 봤다. 그가 깔아준 이불에는 머리카락이 정말 많아서 한숨 섞인 웃음만 나왔다.
비스듬히 누워서 방송을 보는 그를 나는 뒤에서 바라보았다.
나는 그를 위해 만든 양말토끼인형을 보여주었고, 환하게 웃는 그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꼭꼭 참았던 고백특집! 슬램덩크 폰케이스를 보여주자 그는 빵 터졌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 했다. 고백특집 2였던 눈물의 도넛사건을 듣고도 빵 터져서 웃었다.
우리는 전에 그랬던 것처럼, 누워서 도란도란 얘기를 했다.
충격적이었던 건, 전에 나에게 자신의 슬픈 이별이야기를 말했던걸 전혀 기억 못 한다는 거다. 전혀. 그때 당시 그렇게 심각하게 얘기했으면서.
그래서 다시 말하려고 하길래,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라고 했더니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가끔씩 그의 기억능력이 의심된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아서 나에게도 말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걸까. 어쩐지 기쁘기도 하다. 나에게 말해줬다는 사실이.
그리고 처음으로 드는 생각에 미안해졌다.
당신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아픈 이야기를 하는데 나는,
들어주고는 있지만 정작 머릿속에선 당신 생각만 하니까.
공감하지도 않는 주제에 열심히 들어주는 척한 거라고 생각하고 화를 내진 않을까.
화내지 말아 줘요.
당신이 사랑했던 그 어떤 사람도 나는 미워하지 않아요.
당신이 아파했던 그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듣지 않아요.
어쨌든 짧더라도 당신에게 사랑받은 사람들이 부러운 건 사실이지만,
그런 말들을 들으며 위선자처럼 걱정한 척한 것도 아니에요.
나는 단언컨대 당신을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당신이 아파하는 그 모든 일들에서 진심으로 같이 아파했다는 걸 알아줘요.
새벽 3시 반이 넘어서 우리는 잠들었다.
그는 여전히 코를 골았지만, 저번보다는 조용했다. 나는 그의 소리와, 가끔씩 우는 닭소리에 빠져들어 잠들었다.
토요일 아침 8시 반쯤 되어 느적느적 방울토마토 몇 개를 먹고, 옷을 입고 나갈 준비를 했다.
케이를 타고 서울로 가서 버스표를 끊고 미스터피자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제 곧 또다시 이별이라는 생각에 뭘 어떻게 먹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점심을 먹고 나니 시간이 잠깐 남아서 우리는 아트박스에 갔다. 같이 돌아다니다가 그는 내게 셜록 케이스북을 사주었다. 나는 팔짝팔짝 뛰었다.
버스는 어느새 왔고, 나는 차에 탔다.
그는, 전에도 그랬듯이 한 번도 버스가 떠날 때까지 배웅해주지 않는다.
자리에 앉아서 창밖을 보니 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언젠가 가능할 수 있을까,
조금의 마음이 생겼으면 좋겠다.
조금 더 보고 싶어서, 헤어지는 게 아쉬워서,
버스가 떠날 때까지 기다려주는 그런 날이 올까.
그런 날이 오든, 안 오든, 나는 버스를 탈 때마다 마음속으로 하염없이 울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