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 없는 잔인함
50
8월
그가 한 달간 연수를 듣게 되어 사람들과 응원을 가기로 했다.
나는 이런저런 고민과 갈등 끝에 결국 약속시간을 두어 시간 앞두고 취소해 버렸다. 다른 동료들도 같이 보는 자리에서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걸 안 그가 카톡으로 미친 듯이 이유가 뭐냐고 물어봤다. 그냥 둘러댔더니 계속 따지길래, 제주도 혼자여행을 가려고 부산엘 하루 일찍 가게 됐다고 했다. 그제야 그는 납득한 듯했다.
사람들은 연수원으로 가서 그를 만나고, 내가 전해달라고 한 응원 선물을 뜯어보고, 그 안에 넣어둔 엽서를 본 모양이었다.
결국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빈칸을 크게 그리고 '착한 사람에게 보인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존 그는, 그걸 사진으로 찍어서는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난다며 카톡으로 보내왔다. 그 빈정거림에 나는 화가 치밀었다.
내가 이제껏 채운 수많은 편지들과 엽서를 제대로 읽어보기나 했는지 의문이 드는 그의 말과 행동을 보아온 게 몇 년째인지 모르는 내게 더 이상 무얼 기대한 걸까, 더 이상 내가 당신에게 무슨 말을 쓸 수 있을까, 빈칸이 가득 찬 엽서를 받게 만든 건 다름 아닌 본인이라는 걸 왜 모르는 걸까 이 사람은.-같은 복잡한 마음에 바로 카카오톡을 탈퇴해 버렸다.
부산에 내려와서 동학년 친구와 통화를 했다. 그는 내가 말도 없이 탈퇴한 것에 화가 나 있다고 했다.
때문에 제주도 여행은 결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여행 이틀째 되던 날 결국 나는 지친 심정으로 전화를 했다. 그는 쿨하게 반응하며 걱정했었다고, 하지만 이제 앞으로 내 걱정은 하지 않을 거라며 말했다.
걱정을 했다면 왜 연락도 하지 않았냐고 묻고 싶었다.
9월 3일
그리고 우리는 방학 내내 연락하지 않았다.
카카오톡을 탈퇴하니 세상만사가 편안했다. 매일 카톡이 왔는지 확인할 필요도, 스크롤을 내려 프로필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8월 말에서야 나는 겨우 현실로 돌아왔다. 다시 카카오톡에 가입을 했다. 그날 바로 다시 등록했냐는 카톡이 왔다. 나는 한마디로 대답하고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올해 겨울엔 관리자 퇴임식이 있었다. 젊은 나이대의 사람들은 거의 강제로 퇴임축하 공연에 동원되어 틈틈이 춤연습을 해야 했다.
그 전날 미리 부산에서 올라온 나는 집안 대청소를 끝내고 나서 냉장고에 있는 5종류의 술을 다 먹어치우고는 펑펑 울어서 눈두덩이가 두배로 부풀어 버렸다. 그래서 선글라스를 꼈더니 나도 모르게 그 사람에게로 눈길이 가는 걸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웃소 떠드는 그를 곁눈질로 지켜봤다.
퇴임식을 빠져나와서는 저녁에 B와 만났다. 웬일로 술을 마시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왔고, 참고 참았던 전화를 했다. 그는 이제 막 서울로 가려던 참이랬다. 서울이 아니라 여자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그는 나에게 줄 책이 있다고 하길래, 나는 지금 달라고 했다. 그가 그러겠다고 해서 집 앞 편의점에서 술을 사고는 우리는 잠깐 만났다.
그는, 내게 심각하게 말했다. 고민 중이라고. 프러포즈를 어떻게 할지 고민 중이라고. 교장선생님이 전근을 가도 된다고 허락했다고. 그런 얘기를 나에게 했다.
참 잔인하다, 고 생각했다.
그 어떤 도구나 무기를 쓰지 않고도 사람이 이토록 잔인할 수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정말 이 사람이 제정신인지 의심이 들었다. 나를 어디까지 힘들게 해야 만족할까. 왜 내가 몰라도 좋을 얘기를 스스로 하는 걸까. 내가 어떻게 생각하기를 바라는 걸까. 포기하도록? 굳이 그렇게까지 몰아세우지 않아도 난 그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단 걸 알잖아. 이 나쁜 새끼야.
내게 감정이 있다는 걸 알고는 있는 걸까?
그리고는 덧붙여, 그녀를 여기로 한 번 초대할 생각이라며, K와 같이 넷이서 한번 보자는 소리를 지껄인다.
내가 그 앞에서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이 비참하고 씁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