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치 백반과 크리스마스

1부 EP23. 우울도 잠시 비껴가는 하루

by 에스

오늘은 크리스마스다.

코로나 때문에 엄청나게, 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세상은 연말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다. 아침에 출근하려고 차 시동을 켜면 라디오에서는 어김없이 캐럴이 흘러나오고, 아이들은 저마다 산타할아버지가 어떤 선물을 줄지에 대해 기대한다.

나는 어떠한가. 직장을 가진 이후로 이렇게까지 연말 약속이 없던 적은 처음이다. 코로나 여파도 있겠지만, 나 스스로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으니 아무도 다가오지 않는 것일 게다.


어제,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박과 함께 집에서 '고양이를 빌려드립니다'라는 일본 영화를 보았다. 한 여자가 작은 1층짜리 주택에서 길고양이들을 돌본다. 그리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고양이를 일정 기간 동안 빌려주는 내용인데, 그냥 틀어 놓고 가끔씩 화면을 쳐다봐도 내용 파악에 무리가 없는 편안한 힐링 영화였다. 야식으로는 낮에 마트에서 사 온 방어회를 먹었다. 제철이라 그런지 방어의 식감은 아삭하면서도 쫀득하니 너무나 맛있었다. 박은 연말이 되면서 컨디션이 내내 좋지 못해서 절반도 채 먹지 못했다. 그래도 작년, 재작년에 비하면 쓰러지지 않은 게 어디야, 라며 웃었다.


오늘은 휴일이지만 일찍 일어나 대충 아침을 때우고 카페로 나가기로 했다. 박이 편안하게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는 카페를 원해서 좌석이 편한 카페를 찾아보던 중 근교에 소파가 많은 카페를 발견하고 가보기로 했다. 전날 먹은 방어 탓에 속이 불편한 박을 위해 내가 운전대를 잡았다.

나는 운전이 싫다.(공포의 운전면허 편 참고!) 특히 처음 가는 길은 더 싫다. 온몸의 모든 신경이 내비게이션을 향해 곤두서는 느낌이 너무 끔찍하기 때문이다. 내가 잘해도 남이 잘못하면 사고가 난다는 사실도 싫고, 언제 어디에서 차가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것도 불안하다. 하지만 박이 옆에 있으면 조금 나아진다. 박은 운전을 아주 잘하는 6년 차 베테랑이다. 그는 미리 다른 차가 접근함을 알려주거나 내가 놓치는 신호를 봐주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좋은 것은, 내가 평행주차를 못 할 때 그가 도와준다는 점이다. 나는 모든 운전 행위를 통틀어, 주차가 제일 싫다.

아무튼 그 싫어하는 운전대를 잡고 처음 가 보는 길을 운전한 결과, 길을 잘못 들어서 카페를 지나치고 말았다. 유턴도 할 수 없는 길이라 우리는 근처 골목길에 주차를 하고 걸어서 갔다. "운동하는 거지 뭐!" 라며 박은 씩씩하게 말했다. 크리스마스 내내 강추위가 온다더니, 정말 칼바람이 피부를 날카롭게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햇살만은 눈이 부시도록 따사로워서,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물 건너갔다.


카페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었고 1층 전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었다. 내부에는 지름이 내 키만 한 샹들리에가 멋지게 걸려 있었고 큼직한 트리도 장식되어 있었다. 소파 좌석도 많아서 우리가 기대했던 바로 그런 카페였다. 우리는 아메리카노와 레몬 생강차(박은 위장이 나빠 커피를 먹지 못한다), 레드벨벳 조각 케이크를 시켜 2층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얼굴 사진을 잘 찍지 않는 두 사람이지만 오늘만큼은 기념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디저트와 음료를 홀짝이며 서로 가져온 책을 읽었다. 나는 우울증 약이 우울증을 더 키운다는 내용의 건강 서적을, 박은 에세이를 읽었다. 내가 읽은 책에서는 몸의 염증반응이 우울증을 악화시킨다고 하면서, 염증을 없애려면 식습관을 바꿔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예컨대, 케이크나 커피 같은 가공식품을 먹지 말라는 것이다. 그 책을 케이크와 커피를 먹으며 읽으니 아주 묘한 기분이 들며 웃음이 나왔다.

우리는 적당히 책을 읽고 수다를 떨다가, 맛집을 검색해 보았다. 속이 안 좋은 박을 위해 한식집을 찾아보다가 마음에 드는 곳을 발견하고 가보기로 했다.


카페에서 10여분 떨어진 읍내에 있는 청국장 전문점으로, 사람이 꽤 많았다. 우리는 갈치 백반을 주문했는데, 밑반찬도, 같이 나온 청국장도 정말 맛있었다. 우리는 오래간만에 배가 터질 정도로 포식을 했다. 남은 청국장은 포장도 해주셔서 참 감사했다.

너무 배가 불러서 이대로 차에 탈 수 없었던 우리는 동네를 잠시 걷기로 했다. 걷는 김에 복권 판매점까지 가서 복권도 샀다. 나는 이전에 로또 오천 원짜리가 당첨되어서, 도로 오천 원을 또 샀다. 박은 내가 빌려준 돈으로 삼천 원어치의 복권을 샀다. 서로 당첨되면 뭘 할지 얘기하다 보니 어느새 차가 주차된 곳으로 와 있었다.

다시 운전. 2시가 넘은 시각이라 햇살은 더욱더 깊게 차 안으로 파고들어 왔다. 박은 졸리는지 눈을 감았다. 나는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액셀을 밟으려 노력했다.


집에 와서는 엄마께 문안 전화를 드렸다. 요즘 엄마는 엄청 바쁘시다. 동생이 취직이 되어 갑자기 1월 초부터 대구로 출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장 대구에 집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라 매일 부동산 앱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한다. 나도 연초에 본가로 내려가기로 하고 날짜를 조율했다. 엄마는 조금 있다 일을 나가야 한다며 전화를 끊으셨다.


아주 소소한 하루였다. 내 마음속에 거의 '항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늘 곁에 있는 죽음이라는 생각도 잠시 사라질 만큼 소소하고 따뜻한 하루였다. 오늘과 같은 날들이 더 많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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