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통에 버려지는 시간

1부 EP20. 무언가에 몰두할 수 없는 나날들

by 에스

어제는 금요일이라 오래간만에 뒹굴거리다가 늦게 잤다. 대략 10시, 11시 정도였던 것 같다. 덕분에 엄마와 통화도 할 수 있었다. 엄마는 요즘 오후 5시부터 밤 9시까지 장어 전문점에서 일을 하신다. 나는 7, 8시에 잠들기 때문에 시간이 안 맞아서 통화를 할 수가 없었다. 전화를 하니, 엄마는 마침 퇴근하시고 집 계단을 걸어 올라가시는 중이었다. 목소리에서 고단함이 느껴졌고, 나는 수고하셨노라 말을 전했다.


꿈을 많이 꿨다. 꿈의 내용이 바뀔 때마다 계속 깼는데, 아침에 눈을 떴을 직후에는 꿈 내용이 기억났지만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다. 약을 먹으니 아쉬운 것은 잠이 잘 들지만 꿈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밥솥은 비어 있은지 며칠이나 되었다. 식욕 감소가 시작된 이후로 제대로 밥을 지어먹은 적이 드물다. 나는 어젯밤 냉동실에서 꺼내 놓았던 카스텔라 한 봉지와 귤 세 개를 따뜻한 커피와 함께 먹었다. 오래간만에 TV를 켜니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방영 중이었다. 놀라웠다. 저걸 극장에서 볼 때가 중학생이었는데 말이다. 그때 이미 외국에서는 저렇게 멋진 CG로 영화를 찍고 있었다는 게 새삼 놀라웠다.

반지의 제왕과 함께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나서 평일 동안 내버려 둔 식물들을 살펴보았다. 물들은 내가 주지 않은 관심만큼이나 힘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죽어 가는 아이도 있었고, 물이 고파 지쳐가는 아이도 있었다. 나는 서둘러 목마른 식물들에게 물을 주었다. 아뿔싸! 커다란 몬스테라는 화분이 좁디좁아 화분 아래 물구멍으로 굵다란 뿌리를 내보내고 있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는 더 큰 화분을 준비해서 분갈이를 해주었다. 뿌리가 물구멍에 단단히 걸려 있어서 빼내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십여 분간 낑낑댄 끝에 몬스테라는 멋지고 큰 화분에 심어지게 되었다. 나는 뿌듯해서 사진을 찍어 주었다.


오후 1시가 지나서는 책을 들고 느적느적 집 앞 카페에 갔다. 거의 토요일마다 가는 이 카페는 한적한 2층이 있어서 정말 좋았다. 오늘은 따뜻한 자몽차를 시켜서 2층으로 올라갔다. 자리를 잡아 앉고 나서 잠시 뒤 중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 둘과 남자아이 하나가 따라 올라와서 멀찌감치 앉았다. 그런데 남자아이가 휴대폰으로 2층 전체에 다 들리는 커다란 목소리로 통화를 해댔다. 나는 금방 끊겠거니, 하고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통화는 끝날 줄 몰랐고, 남자아이는 웃었다가 소리를 쳤다가, 난리 진상을 부렸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자몽차와 책을 들고 1층으로 내려왔다. 1층에는 손님이 거의 없어서 다행이었다. 비로소 따뜻한 자몽차의 맛을 음미하면서 책을 조금 읽었다. 집중은 잘 되지 않았다. 요즘 들어 무언가에 진득하게 집중하는 게 쉽지 않다. 뭔가를 시작했다가도, 얼마 못 가서 딴짓을 하게 된다. 예전에는 앉은자리에서 책 한 권을 전부 읽을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이건 약의 부작용일까, 내 우울증의 증상 중 하나일까.

그러고 보니, 약을 먹은 뒤로 언어 기능에도 약간 이상한 부분이 생겼다. 어떤 말을 하려고 할 때, 두 가지 낱말이 동시에 생각나면서 그 두 낱말이 섞여서 말실수를 하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실수거니, 했는데 계속 반복되자 언제부턴가 말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이것 또한 약의 부작용일까, 내 우울증의 증상 중 하나일까. 아무도 판별해주지 못하니 답답할 뿐이다.

한 시간 정도 카페에 앉아 있다가 못 견디고 결국 나왔다. 책은 두 권을 가져갔는데 둘 다 10여 페이지도 읽지 못한 것 같다. 밥 먹을 생각을 하니 또다시 지겨워져서 카페 바로 앞에 있는 떡볶이 집에서 떡볶이와 순대를 포장해 와서 먹었다. 반은 먹고 반은 남겨서 냉장고에 넣었다. 그리고 나니 조금 힘들어져서 비상약을 먹고, 다시 일어날 때 모습 그대로인 침대 속으로 쏙 들어왔다.

지금 시간은 오후 5시. 지금부터 잠들 때까지 아마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도저히 그 무엇도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올해는 이렇게 버려진 시간이 그 어느 때보다 많을 것이다. 제발 이런 생활도 올해가 끝이어야 할 텐데. 한 해가 끝나가는 12월이 되니 이런 불안감은 커져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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