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서 봄의 이야기

2부 EP04. 펍에서의 활동과 사람들

by 에스


카페 화재 사건 이후, 나는 7월 여행에서 만난 동생의 제안으로 제주 서쪽의 펍에서 일하게 되었다.

나보다 세 살 어린 L은 협재 바닷가의 칵테일바에서 일을 하다가, 최근에 이 곳으로 스카웃되어 매니저로 일하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일말의 망설임 없이 다가가서 말을 거는 성격으로, 무려 레크레이션과를 나와서 그런지 개그수준이 엄청난 인물이다. L은 내가 묵을 숙소를 안내해 주고, 덮고 잘 이부자리도 구입해 주고, 앞으로 일하게 될 펍에 대해서도 소개해 주었다. 펍은 이 근방에서 거의 유일한 4층짜리 고층 건물의 1층에 위치한 곳으로, 2층은 일식집, 3층은 카페, 4층은 루프탑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펍에는 매니저인 L과 바텐더 두 명, 그리고 홀서빙인 나, 이렇게 총 네 명이서 일하게 되었다.

저녁 6시가 되면 나는 가장 먼저 출근해서 펍을 오픈해 놓는다. 각종 조명을 켜고(조명이 징그럽게 많다) 청소를 하고 주방 정리를 하고 있다 보면 슬금슬금 다른 직원들도 출근해서 각자 맡은 자리로 간다. L은 출근하자마자 직원들 저녁밥 차리기로 분주하다. 김치찌개, 하이라이스, 떡볶이, 국수... 없는 메뉴가 없다. 의무가 아닌데도 L은 매일 저녁 식사를 차려준다. 나는 그를 엄마라고 부르며 많이 믿고 의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오픈 준비를 하고 밥을 먹고 나면 거의 7시 반에서 8시가 된다. 정식 영업 시간은 저녁 7시부터인데, 오픈한지 얼마 되지 않아 손님이 많지는 않았다. 손님들은 주로 2층의 일식집에서 저녁을 먹고 2차로 펍에 방문하시는데, 그래서 그런지 치즈 플래터나 감자튀김같은 가벼운 메뉴를 주로 시키고는 한다. 주문이 들어오면 L은 주방에서 메뉴를 만들고, 나는 커틀러리 세팅을 하고 바텐더가 만드는 음료를 서빙한다. 칵테일을 마시며 손님들은 펍 안에 있는 다트 게임도 하고 비어퐁이라는 술게임도 하며 웃고 떠든다. 우리는 손님들과 같이 다트 내기를 하기도 하며 그들이 좋은 추억을 가지고 가시도록 노력한다.

밤 9시반에서 10시가 되면 2층 일식집 사람들이 퇴근을 하면서 인사를 하고 간다. 일식집은 펍보다는 손님이 많은 모양으로, 가끔씩 재료를 받으러 올라갈 때마다 보면 손님들이 제법 있다. 다섯 명의 셰프들과 네 명 정도의 직원들이 일하는데, 종종 퇴근하고 펍에서 맥주를 한 잔씩 하고 간다. 그 중 동생 J와는 다트 내기도 하고 새벽 네 시까지 하는 술집에서 술도 먹으며 친하게 지냈다. 나보다 나이가 어린데도 생각이 깊고 착하다.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이 참 많은 것이다.

펍은 보통 새벽 2시쯤 영업을 마감하는데, 나는 그 전에 근무를 마치고 먼저 퇴근을 한다. 내가 지내는 숙소는 펍에서 차로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원룸이다. 전에 살았던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는지, 화장실 바닥과 벽면이 온통 붉은 곰팡이로 뒤덮여 있어서 청소하느라 정말 애를 먹었다. 그래도 입주 청소를 하고 나니 창문도 큼지막해 햇살도 잘 들어오고 아주 깔끔한 집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옵션으로 포함된 작은 소파와 리프트테이블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나는 느즈막이 일어나 리프트테이블에 대충 밥을 차려 먹고 나면 소파에 오전 내내 누워 거의 한발짝도 나가지 않곤 했다.

펍에서 일하게 되고 얼마 있지 않아, 첫 번째 룸메이트가 들어왔다. 한 달정도 단기로 일을 도와주기로 한 아이인데, 전화 한통만으로도 나는 그 아이가 얼마나 쾌활한지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둘이서 요일을 나누어서 돌아가며 펍에서 일을 했다. 때문에 우리가 같이 얼굴을 맞댈 시간은 많지 않았지만, 어쩌다 같이 있게 되면 집 앞의 김밥집에서 김밥도 포장해 와서 먹고 서로의 이야기도 하며 사이좋게 지냈다. 아이는 무척 깔끔한 성격으로,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머리카락을 항상 돌돌이로 줍고 다녔다. 덕분에 나는 화장실 청소와 분리수거를 맡아서 하며 집을 꾸려나갔다.

나는 살면서 만난 가장 활기찬 사람이 바로 이 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생각은 두 번째 룸메이트가 들어오면서 곧바로 바뀌었다. 두 번째 룸메이트는 툭, 하고 어깨를 치면 바로 댄스가 재생되는 엄청난 텐션의 소유자였다. 아이는 자기 근무날이 아닌데도 펍에 놀러와서 가게를 휘젓고 다녔다. 같이 있으면 어떤 이유에서든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나보다 나이가 훨씬 어린데도 올해 결혼을 한다고 했다. 결혼에 그 누구보다도 회의적인 나로서는 정말 신기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는 결혼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청춘 라이프를 즐기러 왔다며 약 2주간의 제주살이를 즐기고 육지로 올라갔다.

마지막 룸메이트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중국인 언니이다. 언니는 펍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2층의 일식집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한국에 십 년 정도 살아서 그런지 우리말을 능숙하게 잘 하는 편이었다. 낮에는 언니가 일식집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내가 펍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우리는 거의 마주치지 못했다. 어느 날 밤, 평소처럼 언니는 퇴근을 해서 씻고, 나는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언니가 전화 한통을 받더니 난처한 것처럼 더듬거리며 통화를 하는 것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언니는 소파에 앉아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울먹거리며 이야기하는 걸 들어봐서는 가게에서 혼이 난 것 같았다. 언니는 혼이 난 사실보다도 말이 능숙하지 않아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게 말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속이 상한 것 같았다. 오늘 일 말고도 평소에 은근히 쌓인 게 많아보였던 그녀는 내가 안아주자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외국인 노동자의 현실을 바로 옆에서 이렇게 보고 있으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안쓰러웠다. 중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까. 자신을 낯선 이방인으로 바라보는 수많은 눈길 속에서 살아가는 기분이란 어떤 걸까. 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다.


세 명의 룸메를 거치는 동안 추운 겨울이 지나갔고 봄이 왔다. 펍에서 일하는 동안 다섯 달이 훌쩍 지나간 것이다. 같이 일하던 사람들과 스쳐 지나간 수많은 손님들. 우리가 함께한 추억들. 나누었던 길고 긴 이야기들을 아마 잊을 수 없으리라.



이전 03화추석 그리고 비타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