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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l Kim Jul 22. 2021

보이지 않는 손

1주일 동안 일어난 마법 같은 이야기

나는 꼼꼼하게 계획하는 것을 선호한다. 회사 일이든 개인 일이든 최대한 미리 할 수 있는 것은 미리 해놓고 그 이후에 발생하는 불확실성이나 추가적인 일에 대응하는 식이다. 이렇다 보니 업무에 빈틈이 적어지고 실수가 줄어든다는 좋은 점이 있는 반면, 결국 필요하지 않았던 일 혹은 고민에 시간을 과하게 쓰거나 불확실성을 지나치게 신경 쓰게 된다는 단점도 분명하다. 


이런 성격 형성에는 분명 타고난 천성의 영향도 있겠지만 성장 과정이나 업무 환경의 영향도 적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불화와 잦은 이사, 경제적인 스트레스로 인한 불확실성에 늘 노출되어 있었고, 10년 가까이 일한 두 회사도 모두 빠른 진행과 성과보다는 정확성과 완벽성을 중시하는 곳이다 보니 자연스레 계획하고 대비하는 것이 몸에 배었다. 그에 대한 부작용이랄까? 계획하고 예상하기 어려운 일들에 대한 선호도가 적어지고 리스크를 회피하려는 태도를 내 일상에서 종종 볼 수 있다. 가능성이 낮아 보이거나 불확실한 선택지를 아예 고려도 하지 않고 배제하는 식이다. 실제로 작년에 영주권 프로세스가 몇 번씩 암초에 걸릴 때마다 가장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지금 당장의 고통 (i.e. 금전적 어려움)이 아니라 언제 이 일이 끝날지, 가능성이 얼마나 될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지난달 말, 가족들과 함께 마음의 고향 Austin으로 짧은 여행을 떠났다. Austin에 있을 때 다니던 L 교회 건물에 들어서며 아는 얼굴들과 반가운 인사를 건네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 본당에 앉았다. 설교 직전, 담임목사님은 우리 가족들을 일어서게 하시더니 먼 버지니아에서 여기까지 왔다며 교인들과 함께 축복송을 불러 주셨다. 시집갔던 딸자식이 몇 년 만에 친정에 오면 이런 기분일까? 감격에 가슴이 짜르르해지는 기분이었다. 


예배를 마치고 교회를 나오는데, 낯선 카톡이 왔다

"선배님 Y입니다. 영상으로 예배드리다가 오신 거 봤습니다. 시간 되시면 잠시라도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Y는 MBA 1년 후배이다. 한국인 MBA 모임 있을 때마다 자주 보긴 했지만 사실 학교 선후배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내 졸업 이후에는 서로 연락할 일이 없었다. 친한 후배를 통해 졸업 후에도 Austin에 계속 머무르며 구직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게 전부였다. 그렇기에 갑작스러운 연락이 의아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먼저 연락을 준 것에 대한 고마움과 반가움이 더 컸고 다음 날에 커피 한잔 하기로 약속을 잡았다. 


구직 스트레스로 인해 약간 초췌해지긴 했지만 Y의 얼굴은 생각보다 괜찮았고 만남도 밝은 분위기로 흘러갔다. 몇 년 간의 근황을 나누고, 가족들의 안부를 물은 이후 자연스레 주제는 구직으로 흘러갔고, 그는 더 이상 본인의 주전공인 마케팅 직종에만 집중하지 않고 다른 포지션에도 지원하고 있다고 했다. 아무래도 2020년에 졸업하자마자 COVID가 터졌으니 취업이 어려웠을 거고, 지금도 기회가 그리 많지 않을 테니... 혹시나 내가 일하는 B 사에서 자리가 나면 연락해 주겠다고 했고, 그도 '그러면 정말 고맙겠다'라고 하며 만남을 끝냈다.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닌데도 묘하게 마음이 쓰이는 경우가 있다. 최근에 나온 Y의 셋째 자녀 이야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장기간의 구직에 대한 동정심 때문이었을까? 사실 미국 직장에서는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추천 (referral)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데, 자칫 채용 후 performance가 좋지 못하다면 추천자에 대한 신뢰가 하락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Y를 추천할 만큼 그의 실력이나 인품에 대해서 잘 아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계속 마음 한구석에 찜찜함이 남아 있었고, 결국 '한번 시도나 해보자'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 당시 회사에서 진행되는 채용은 Junior Level 뿐이라 Y를 위한 기회는 없었지만, 같이 일하는 임원들에게 'Mid Level 괜찮은 사람이 있는데 인터뷰 한번 보시는 게 어떠냐'라고 슬며시 옆구리를 찌르는 것이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과정이 생각보다 상당히 쉽지 않게 흘러갔다. 이력서를 훑어본 임원 A는 학력이나 경력이 신통치 않다고 했고, 임원 B는 경력 전환과 그에 따른 낮은 임금을 그가 받아들일 수 있을지 회의적이었다. HR 담당 임원 또한 그가 장차 마주칠 어려움 - 체류 신분, 회사 상황에 따른 실직 위험 등 - 을 언급하며 Y가 충분히 각오하고 있는지를 재차 확인하라고 했다. 서너 번 이야기를 꺼내고, 심지어 '인터뷰 보는데 비용 드는 것도 아니다. 한번 봐서 좋은 사람이면 뽑고 맘에 안 들면 그냥 떨어뜨리면 되는 일 아니겠냐?'라는 식으로까지 하자  (내 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오지랖이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제서야 일이 진전되기 시작했다.


마침내 지난주 수요일 HR에 인터뷰를 잡으라는 오더가 내려갔다. 결과야 어찌 되었건 나는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을 끝냈기에 후련한 마음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가 1차 인터뷰 혹은 임원 A와 있을 2차 인터뷰를 통과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Y는 회사가 선호하는 경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몇 번의 추천에도 불구하고 인터뷰를 볼 A의 반응이 워낙 신통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Y는 지난주 말 1차 인터뷰를 통과했고, 어제 A와의 2차 인터뷰도 통과하여 이제 며칠 뒤에 있을 최종 인터뷰를 기다리고 있다. 보통 3주, 길면 한 달도 넘게 걸리는 프로세스가 불과 1주 만에 끝나는 셈이다. 그가 최종 인터뷰를 통과할지, 혹은 회사에서 제시한 조건에 동의하여 입사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내가 예상한 것 훨씬 이상의 일이 순식간에 일어난 것이다.  




이번 일이 어떻게 끝날지, 나에게 혹은 회사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난 일주일간 보이지 않는 손이 인도한 것처럼 순조롭게 이어진 일들을 돌이켜 보면서 '아, 되는 일은 되는구나. 내 예상과 계획과 훨씬 다른 일도 이렇게 일어날 수 있구나'라는 교훈을 마음 깊이 새기게 되었다. 당장 다음 달로 예정되어 있는 영주권 중요 이벤트와 앞으로의 미국 생활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요즈음, 광야에 있는 내 삶에도 이런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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