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MLB (Major League Baseball) 올해의 선수를 꼽으라면 누구나 오타니 쇼헤이를 꼽을 것이다. LA Angels에 입단할 때부터 투타겸업 (투수와 타자로 시즌 내내 뛰는 것)을 선언하며 세간의 주목을 받은 그는 2~3년간의 조정 기간을 거쳐 마침내 올해 완성형으로 거듭났다. 투수로 선발 로테이션을 소화하며 100이닝 이상을 투구하며 9승을 거둔 동시에 타자로도 많은 경기에 출장하는데, 홈런 개수가 무려 45개로 (리그 3위) 공동 1위와 불과 1개 차일 뿐이다. 만화에서 나와도 '이건 과장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 할 수준의 퍼포먼스를 현실에서 보여주고 있으니 특별한 이슈가 터지지 않는 이상 MVP 수상은 기정사실로 여겨진다.
아마추어 레벨에서의 투타 겸업은 사실 드물지 않다. 리틀 리그, 혹은 중고등학교 때야 한국이든 미국이든 투수와 야수를 겸하는 경우가 꽤 있으니까. 하지만 그 이상의 레벨로 올라갈수록 경쟁은 점차 살벌해지고, 한쪽에만 최선을 다해도 프로로 가는 문은 너무나 좁기에 프로 레벨에서 투타겸업은 거의 불가능한 일로 여겨져 왔다. 실제로 역사상 최고의 야구 선수인 베이브 루스 이후 100년간 두 자릿수 승리 & 두 자릿수 홈런을 달성한 선수가 단 한 명도 없기도 하다. 하지만 올해 오타니는 투수와 타자 양쪽에서 전부 최고 수준의 재능을 뽐내고 있어 더 이상 누구도 그에게 '하나만 잘해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한때 넉넉하게 리그 홈런 선두였던 오타니지만 요새 장기간 홈런이 나오지 않아 언론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데 (홈런을 치는 게 아니라 못 치는 게 뉴스가 되는 것도 아이러니다), 투타 겸업으로 인한 체력 소모 영향도 있겠지만 상대 팀이 그를 상대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된 이유로 들고 있다. 워낙 타석에서 위협적이다 보니 스트라이크 존 밖으로 유인구를 던지며 어렵게 승부하거나 아예 고의사구 (Intentional Walk)로 걸러버리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4경기 13 사사구'라는 진기한 기록도 세웠는데, 이는 투수들이 얼마나 그와의 승부를 피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아마추어 야구에서는 고의사구를 구경하기가 더 어렵다. 프로처럼 한두 점에 승부가 갈리는 경우가 잘 없기도 하고, 상대방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기에 중심타선이라고 굳이 거를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투수 입장에서 주말에 기분 좋게 야구하러 나왔는데 감독이나 포수가 '저 타자 거르자' 하면 자존심이 상하기 마련이다. 아니면 '잘 던져서 잡으면 되지 왜 피해?' 하는 호승심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 어렵게 승부하거나 일부러 스트라이크 존 밖으로 계속 던졌다가 투수의 밸런스가 무너져 경기가 터져버리는 경우도 있기에 내가 감독이어도 어지간하면 고의사구 작전을 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만약 고의사구를 택한다면, 그건 투수가 봐도 타자가 너무 잘하거나, 아니면 2 아웃 상황에서 지금 타자보다 뒤의 타자가 많이 약해서 쉬운 아웃을 잡고 싶은 경우 정도가 아닐까 싶다.
여태까지 10년 넘게 야구를 했고, 어느 팀에서든 중심타선에서 활약했지만 2020년까지는 단 하나의 고의사구도 경험해보지 못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올해는 두 번이나 고의사구로 1루에 나가는 경험을 했다. 한 번은 한국 리그에서, 다른 한 번은 미국 리그에서.
1) 2019년 여름에 버지니아로 옮겨온 이후 한국 야구 리그에 가입해서 여러 팀들과 친선 경기를 했다. 처음 몇 달은 나를 신경 쓰지 않았던 상대 팀들이 2020년 가을부터는 서서히 견제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유독 내 타석에서 변화구를 많이 던진다든가 타구가 자주 가는 방향으로 수비 시프트를 거는 식으로 말이다. 서로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일반적인 사회인 리그와 다르게 이곳에서는 야구팀이 고작 7개밖에 없기에 상대팀 주요 선수에 대한 정보를 얻기가 쉽기도 하다. 올해 리그가 시작되고 두 경기 연속 홈런을 치자 견제는 더욱 심해졌는데, 3 볼 0 스트라이크에서 존 밖으로 떨어지는 변화구를 던진다든가 (이 상황에서는 MLB에서도 95% 이상 한가운데 직구를 꽂는다) 아예 게임 내내 나에게는 직구를 거의 주지 않는 식이었다. 얼마 전 리그 경기에서는 2사 1,2루 상황에서 내 타석이 돌아오자 아예 외야에서 "어렵게 가! 그냥 보내도 괜찮아"라는 고함 소리가 들려오더니, 투수의 초구가 포수 뒤로 빠져 2,3루가 되자 포수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저기요, 1루 가세요." 주말 귀한 시간 내서 야구하러 온 건데... 나도 치고 싶은데...
2) 미국 아마추어 리그의 수준은 한국 리그에 비해 월등히 높다. 다들 최소 고등학교나 대학교 때까지 야구 경험이 있고, 심지어 프로 경험이 있는 선수들까지도 제한 없이 섞여서 운동하기 때문이다. 나도 나름 열심히 연습하고 노력했지만 선천적인 체격, 근력의 차이도 있거니와 쌓인 기술의 격차도 메우기가 쉽지 않았고, 그렇기에 어느 팀에서든 라인업 상단에 이름을 올려놓기 어려웠다.
풀스윙으로 장타를 뻥뻥 날리는 한국리그에서와 달리 이곳에서의 내 타격 스타일은 컨택 위주, 흔히 말하는 '똑딱이'다. 110km 중후반에서 140 km 초중반까지 나오는 이곳 투수들의 패스트볼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타격 폼을 바꿔야만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도 네 번에 한 번도 안타를 치기 어려우며, 2루타 이상의 장타는 1년에 한두 번 나올까 말까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지난 경기는 확실히 특이했다. 정규 리그가 아닌 가을리그라 그런지 투수들의 공은 확실히 칠만 했고, 첫 타석에서의 좌전 안타를 시작으로 둘째 타석에서의 잘 맞은 희생 플라이, 세 번째 타석에서는 변화구를 정확히 타격해서 펜스를 원바운드로 맞추는 2루타를 만들어냈다. 세 번 모두 제대로 된 스윙을 했기에 1 아웃 1,2루 찬스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갈 때도 자신감이 넘쳤다. 초구 직구는 몸 쪽으로 상당히 깊게 들어오는 볼이었고, 그 순간 주자들이 이중도루를 감행하여 1 아웃 2,3루가 되었다.
'됐다, 2타점 기회다'라고 생각하던 그 순간, 투수는 갑자기 포수를 마운드로 불렀고 짧게 대화를 끝내고 돌아온 포수는 심판에게 말했다. "We will skip this batter." 지난번과 똑같이 배트를 내려놓고 1루로 걸어 나갔지만 기분은 180도 달랐음을 고백해야겠다. 고의사구라고? 한국 리그도 아닌 미국 리그에서? 내가? 이닝이 종료되고 더그아웃에 들어왔을 때 팀 동료 중 하나가 나를 툭 치며 "You are intimidating Sol (너 오늘 아주 위협적인데), I like it!"라고 하는 말에 기분은 더욱 좋아졌다.
고의사구를 상대팀이 보내는 respect라고 생각한다면 자랑스러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한 경기에 겨우 3~5번 돌아오는 타석 중의 하나가 강제로 없어져버리는 것이기에 아쉬움도 만만치 않다. 내년에는 그냥 승부해줬으면 좋겠는데 그건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니까... 이런 상황이 또 온다면 그냥 한숨 푹 쉬고 배트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왕 배트를 내려놓을 거면 홈런을 치고 이렇게 하는 게 훨씬 신날 텐데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