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같던 지난주를 돌아보며
어릴 때는 "왜 이리 시간이 빨리 가냐"라는 어른들의 한탄을 이해할 수 없었다. 책상 앞에서의 40분은 너무나 길었고 방학까지 남은 날 수는 지겹게도 줄어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며 언제부턴가 "뭘 했다고 벌써 연말이냐, 시간 진짜 빠르네"라고 혼잣말하는 것도 진부해질 지경이다. 특히 지난 몇 년간의 이민 생활은 더욱 그랬는데, 한 순간도 온전히 마음을 놓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잘 자잘한 이벤트에 놀라고 화내고 안도하고 슬퍼하다 보면 어느새 한 달이, 계절이, 한 해가 훌쩍 지나있곤 했다.
이런 정신없는 미국 이민 생활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지난주는 그야말로 폭풍같이 지나갔다. 월요일부터 아내와 태민이의 EAD (Employment Authorization Document, 근로 허가서)가 승인되었다는 통보를 받고 뛸 듯이 기뻐했지만 이건 그저 시작에 불과했다. 이틀 후 회사 임원이 전화를 걸어 승진과 (기대 이상의) 임금 인상을 알리며 축하해 주었고, 불과 다음 날엔 우리의 집 구매 Offer를 판매자가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부동산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한 달에 한 번, 아니 일 년에 한 번 일어나도 기뻐하며 두고두고 기억할만한 일들이 불과 일주일 동안 줄줄이 일어난 것이다!
해외 뉴스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팬데믹 이후로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고 금리가 내려가서 구매 여력이 생김에 따라 미국의 부동산 가격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급격히 오르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텍사스 주, 애리조나 주 등은 1~2년 사이에 수십 퍼센트가 오른 집들이 수두룩하며, 내가 거주하는 북버지니아 쪽도 동네마다 다르지만 10~30%의 상승은 이야깃거리도 되지 못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주택 시장은 극도의 Seller market (매도자 우위의 시장)이라, 집 한 채가 매물로 올라오면 금세 10건~20건의 offer가 몰리며 최초 등록한 가격보다 수만 불씩 올라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난 12월 말에 내 근로 허가서가 나오면서 집 구매에 대한 생각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는 마루와 방 하나밖에 없을 정도로 좁기 때문에, 아이가 커 가면서 온 가족이 공간 부족에 따른 스트레스를 크게 받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몇몇 은행들은 근로 허가서만 있으면 주택담보대출 (Mortgage)이 가능하다고 했고, 이를 확인한 후 1월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부동산 에이전트와 집을 보러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비성수기에는 경쟁이 낮았는데 요새는 그런 거도 없다. 최근에 팔린 집도 오퍼가 열개 넘게 들어왔었다'는 에이전트의 말마따나 이 과정은 쉽지 않았다. 비성수기인 겨울이라 나온 집도 별로 없었지만, 나온 집들도 가격이 상당했으며 많은 경쟁자들과 동시에 집을 둘러보며 상황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체감해야 했다. 그 와중에 마음에 쏙 드는 집이 있어 그야말로 영끌을 해서 오퍼를 넣었지만 퇴짜를 맞았고, 다른 집은 가격은 낮았지만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돈과 노력을 얼마나 들여야 사람이 살 만할 수준이 될지 짐작이 어렵기도 했다.
점심을 먹고 와이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와이프가 문득 인터넷 사이트에 나온 집을 한채 발견했다. 사진을 보니 상태도 굉장히 괜찮고, 주변 학군도 좋고, 각종 편의시설도 가까워서 '왜 이 집이 아직까지 안 팔리고 있지?' 의문이 들 정도의 집. 곧바로 에이전트에게 전화를 걸어 집 투어를 요청했고, 불과 30분 만에 지금 가서 볼 수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가서 본 집은 오래 볼 필요도 없을 정도로 깨끗하고 관리가 잘 되어 있었기에 곧바로 구매 Offer를 작성해서 제출했고, 제출 2시간 만에 계약서에 양 측의 서명이 완료되었다. 집을 사기 위해 수십 번의 집 투어를 하면서 몇 달간 고생하는 게 보통인데 고작 세번만에 결정이 난데다가, 집 투어에서 계약서 서명까지 불과 4시간 반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누가 미리 세팅을 해 놓았어도 이렇게 빨리 진행되지는 못했을 텐데 지금 생각해도 신기할 따름이다.
알고 보니 이 집은 3주 전에 이미 판매되었지만 구매자의 재정적 사유로 인해 계약이 파기되어 집주인은 이자만 내며 집을 비워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미 약간의 Offer를 들고 있지만 별로 성에 차지 않는 조건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강력한 의지를 보이는 구매자가 나타났으니 판매자도 굉장히 빨리 반응했고, 가격을 절충해 달라는 요청에도 응해서 결국 최초 등록된 가격보다 만 불이나 낮은 가격에 집을 구매할 수 있었다. 지금 같은 Seller market에서 상태가 좋은 집을 가격을 올리기는커녕 깎아서 샀다는 말에 주변 지인들도 굉장히 놀라워하며 축하해 주었다.
그때 기드온이 하나님께 말하였다. “만일 주께서 약속하신 대로 나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하시면 그 사실을 나에게 증명해 주십시오. 내가 오늘 밤 타작마당에 양털 한 뭉치를 놓아두겠습니다. 만일 아침에 이슬이 양털에만 내려 있고 그 밖의 모든 땅은 말라 있으면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을 내가 알겠습니다.” 그러자 그가 말한 그대로 되었다. 기드온이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그 양털 뭉치를 짰을 때 물이 한 그릇 가득 나왔다.
그때 기드온은 다시 하나님께 이렇게 말하였다. “나에게 노하지 마십시오. 양털로 한 번만 더 확인하게 해 주십시오. 이번에는 양털만 말라 있고 그 밖의 모든 땅에는 이슬이 내리게 하소서.” 그래서 그날 밤 하나님이 그대로 하셨는데 양털만 말라 있었고 모든 땅은 이슬로 젖어 있었다. (사사기 6장 36~40절)
금전, 신분, 집, 아들 태민이의 장애 등 여러 어려움에 마음이 힘들던 2021년은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 거리를 달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하나님, 기드온에게 보여주셨던 기적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미국에 계속 사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예비하신 사건을 보여 주셔서 앞으로의 험난한 타국 생활을 버틸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마음속으로 계속 되뇌면서. 이번 달에 집을 찾고 구매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뼛속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고, 언제 출구가 보일지 알 수조차 없는 아이의 자폐는 시시때때로 마음을 어렵게 하지만, 이제는 보여주신 사건을 의지하며 온 가족이 함께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