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계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직원의 절반 가량은 백인, 흑인, 인도인 등 다양한 인종이지만, 오너, 임원진, 시니어 개발자들 대부분은 30대 이후에 한국에서 건너와서 정착한 한국계 미국인 혹은 영주권자이니 사실상 한국 회사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서 회사 생활을 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의미 없는 야근과 회식이 거의 없다는 것은 매우 큰 장점이지만, 상대적으로 경직되어 있는 조직 문화나 위계질서에 피곤할 때는 내가 한국에 있는 건지 미국에 있는 건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흔히 '이민자는 한국에서 떠난 시기에 머물러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실제로 한인 분들과 만나서 이야기해 보면 이 말을 실감하게 되는데, 개개인의 인품을 떠나서 1970년대에 이민 온 사람은 70년대의 습관이, 1990년대에 이민 온 사람은 90년대의 습관이 몸에 배어 있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회사 선배들이 IT 버블 시기 1990-2000년대에 이민 온 탓일까? 이 회사에서 일한 지 4년 가까이 되어 가는데도 아직도 당황스러운 상황이 적지 않다. "까라면 까" 식의 오더를 스스럼없이 내리거나 받는 모습, 밤늦게나 새벽까지 작업하고도 그러려니 하는 모습을 볼 때면 왜 많은 미국인 직원들이 이 회사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는지 이해가 간다.
내가 워낙 취업과 신분 문제로 인해 고생을 많이 했기에 기회가 될 때마다 주변 사람들, 특히 신분 문제로 고생하는 사람들의 구직에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다. 잘 풀려서 몇 년간 같이 일하다가 더 좋은 곳으로 떠난 케이스도 있고, 지난 글에서처럼 아쉬운 결과로 이어진 경우도 있었다. 혹자는 '네가 추천한 사람이 너 밀어내면 어쩌려고 그러냐'며 너무 나서지 말라고 조언하기도 했지만, 글쎄, 난 그저 단순하게 생각하고 선한 영향력을 미치려 했을 뿐이다. 회사는 좋은 사람을 뽑으니 좋고, 구직자는 미국 정착과 신분 문제를 해결할 길이 생겨서 좋은 것이니 내가 조금만 노력하면 모두가 행복할 테니까.
최근에도 지인의 소개를 통해 알게 된 분을 회사에 추천했다. 한국 유수의 대학을 졸업하고 이름만 대면 아는 회사에서 10년 이상 재직할 만큼 출중한 사람이었기에, 지금 뽑는 포지션과 fit이 아주 좋은 편이 아니었음에도 추천하는데 큰 고민을 하지 않았다. 3개월-6개월만 적응 기간을 거친다면 시장에서 구할 수 있는 인력들 대비 월등한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으니까. 매니저 인터뷰, VP 인터뷰 모두 순조롭게 흘러갔고, 다들 "IT 경력은 없어도 스마트하고 성격도 좋으니 금방 적응할 것"이라는 평가를 내놓았다. 하지만 최종 면접 결과는 낙방이었고, 전해 들은 이유는 여전히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그저 여기는 한국 회사라는걸 새삼 깨달았을 뿐. 물론 비자 스폰서십 문제도 결정에 영향을 미쳤겠지만, 결과적으로 '회사의 운영과 성장에 도움을 줄 인재'라는 나의 선의는 회사의 최선이 아니었던 셈이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닌데 유독 이번에는 입맛이 쓰다. 이 정도 살았으면 이런 일은 그러려니 흘러갈 줄 알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