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 3일 1800km를 달렸습니다
미국 생활을 시작하며 만들었던 버킷리스트 아이템 중 하나는 '30개 MLB (Major League Baseball) 야구장 다 방문해 보기'였다. 지난 6년간 총 23개 야구장에 발을 디뎌 보았는데, 한번 방문에 티켓, 음식, 기념품 등 $100-200씩 깨지는 건 예사인 데다 가면 갈수록 즐거움보단 뭔가 모를 의무감(?)이 더 크게 다가오면서 '내가 왜 이걸 하고 있나' 자조하기도 했다. 그래도 아직 야구장에 들어설 때 가슴이 설레는 걸 보면 나는 어쩔 수 없는 진성 야구팬인가 보다:)
작년 말 20번째 구장을 방문하면서 제 남은 곳은 고작 10군데. 상당수가 굳이 갈 이유가 없는 도시들에 위치해 있다. 그나마 상대적으로 가까운 중서부 (midwest)의 디트로이트, 클리블랜드, 피츠버그 - 차로 4-10시간)를 한 번에 다녀오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는데, 실제로 6월 중순에 주말 동안 세 경기를 모두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주중이면 감히 갈 엄두를 못 내었을 텐데 정말 운이 따랐다.
<Day 1, 디트로이트>
금요일 새벽 6시,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디트로이트를 향해 출발한다. 북버지니아에서 9시간 걸리는 꽤나 먼 여정. 다행히 경기가 밤 7시가량이기에 피츠버그 근교의 유명 건축물인 Fallingwater에 들렀다 가기로 한다. 미국을 대표하는 건축가인 Frank Lloyd Wright의 주말 별장으로 지어진 Fallingwater는 이름처럼 폭포 위에 지어진 저택인데, 워낙 유명해진 나머지 지금은 박물관처럼 관광명소가 되었다. 건물의 위치도 좋지만 내부도 아늑하고 깔끔하게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디자인되어 있었다.
간단히 점심을 먹은 후 거의 6시간을 더 달려 디트로이트에 도착했다. 워낙 이곳의 치안에 대해 흉흉한 얘기를 들어서 긴장을 좀 했는데, Comerica Park 야구장 근처는 유동인구도 많고 고급 상점도 많은 등 굉장히 깔끔해서 걸어 다니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유월 중순인데도 적당히 서늘해서 야구를 보기에 최고의 날씨였고, 무엇보다 이 동네 명물인 시저스 피자를 먹었는데 꽤나 괜찮았다.
<Day 2, 클리블랜드>
오전에는 디트로이트 근교 Dearborn에 위치한 헨리포드 자동차 박물관을 들렀다. 다양한 자동차, 기차, 마차, 엔진, 가구 등 자동차 박물관이라기보다는 미국 lifestyle 박물관이라고 부르는 게 더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 얼핏 머리를 스쳐갔다. 근처에 아이들과 같이 온다면 꼭 한번 들를만한 곳.
점심을 먹고 클리블랜드의 Great Lakes Science Centre로 향했다. 솔직히 큰 기대 없이 방문했는데 아이가 체험할만한 다양한 구성으로 되어 있어 와이프가 굉장히 만족해했다. 곧이어 방문한 Progressive Field 야구장 시설 자체는 꽤나 좋았지만, 홈팀인 가디언즈가 초반부터 너무 박살 나는 통에 관객들이 영 기운이 없어 보는 재미가 덜했다.
<Day 3, 피츠버그>
이틀간 1300km를 달리는 강행군에 피곤한 와중에도 온라인 예배를 마치고 피츠버그에 있는 Phipps Conservatory and Botanical Gardens에 방문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식물원이다. Must See 까지는 아니지만 근처에 오면 한두 시간 잘 보낼 수 있는 곳.
PNC Park 야구장에서 도보로 3분 거리에 위치한 앤디워홀 뮤지엄에 도착했다. 미술엔 취미도 소양도 없는지라 많은 작품들이 이해의 영역 밖에 있긴 했지만 독특한 작품들이 많아서 보는 재미는 있었다. 관람객들이 커다란 알루미늄 풍선이 가득 찬 공간에서 풍선을 만져볼 수 있게 해 놓은 공간인 'Silver Cloud'라는 작품을 아이가 특히 좋아했다.
야구장에 걸어 들어가자마자 우레와 같은 함성 소리가 터져 나온다. 끝나지 않는 환호와 박수갈채. '홈런이라도 나왔나?' 싶었지만 스코어보드는 0:0이었는데, 알고 보니 돌아온 해적선장 앤드류 맥커친의 통산 2000번째 안타가 터진 순간이었다. 아... 5분만 일찍 올걸... 역사의 순간을 간발의 차이로 놓친 아쉬움은 꽤나 컸다. 요새 잘 나가는 배지환 선수가 2루수와 중견수로 출장하면서 2루타와 결승 득점까지 올리는 걸 보면서 아쉬움을 그나마 달랠 수 있었다.
3일 연속 야구 관람은 한국에서도 해본 적 없었는데, 넓은 미국에서 주와 주를 이동하면서 한다는 건 꽤나 신선하면서도 자극적인 경험이었다. 1100마일 (1800km)이나 운전하면서 체력적으로 좀 고되긴 했지만, 그래도 가족 모두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었음에 감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