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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작가 김민솔 Sep 12. 2024

유짐유죄, 무짐무죄

‘그래, 짐이 많은건 죄야, 난 전생의 죗값을 지금 치루는거야’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는 날이었다. 2년 정도 있다가 올 생각이었다. 중형 캐리어 하나와 기내용 소형 캐리어 하나, 백팩과 에코백. 자그마치 4개의 짐덩이들을 이고 지고 끌고 싱가포르에서 환승까지 하여 호주 땅에 도착했다. 버스, 비행기, 택시, 기차 등 온갖 탈것에 실려 다니는 동안 이 짐들만 좀 없었어도 체력적으로 덜 힘들었을 텐데 후회가 막심했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이토록 이고 지고 온걸까?


농장 쉐어하우스에 도착했다. 옷가지들을 꺼내어 옷걸이에 걸고 씻을 것들은 욕실에 두었다. 당장 필요한 슬리퍼와 멀티탭, 그리고 다이어리와 필기구 등을 꺼내어 침대 옆에 두고 문득 둘러보니 굳이 모든 짐들을 캐리어에서 꺼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88일 근무 일수를 채우고 나는 여기를 떠날 테니 말이다. 농장에서는 입을 일 없겠지만 혹시 몰라 가지고 온 예쁜 원피스와 구두는 잠시 넣어두고, 겨울 옷도 꺼내지 않았다. 미래에 사귈 친구들을 위한 한국 마스크팩 선물들도 아직 친구를 사귀기 전이니 넣어두고, 대량구입해 속속들이 끼워 온 kf94 마스크와 자가진단키트도 일단은 넣어두었다. 미래에 만들 추억을 프린트해줄 즉석 사진 인화기와 필름도 넣어두고, 약 6개월은 거뜬할 각종 세안용품, 화장품, 비상용 렌즈와 안경들도 넣어두었다. 심지어는 유기농 생리대까지 족히 3개월은 쓸 분량을 가지고 왔다. 그러고보니 나는 혹시 모를 상황과 미래의 나를 위해, 미래의 내가 사귈 수도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친구들 몫 까지 짊어지고 온 꼴이었다. 이 짐들 때문에 나는 걸음을 재촉하지 못해 기차를 놓칠 뻔 했고 온 몸은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짐이 많으니 삶의 질이 이토록 낮아지는구나, 유짐유죄 무짐무죄로구나.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스물 둘, 교환학생으로 중국에 갔던 그 때에도 내가 쓰는 생리대를 고집하며 6개월 어치를 꾸역 꾸역 챙겨갔다. 5년이 지나도 변한 건 없었다. 현재의 나는 조금 다르다. 전 세계의 여성은 월경을 하기 마련이고 그러므로 전 세계에는 생리대를 팔 것이니 굳이 내 가방을 생리대로 빼곡히 채울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베트남에 가면 베트남 생리대를 사서 써본다. 쿨링 생리대가 있는지는 꿈에도 몰랐다. 누가 밑에다 부채질을 해주는 기분도 느껴보며 신문물을 체험하는 즐거움을 맛보았다. 호주는 종류가 더 많았다. 심지어 우리나라 보다 물가는 비싼데 생리대는 비슷하거나 약국 자체 할인이 들어가면 더 저렴했다. 사이즈도 정말 다양했다. 국산 오버나이트는 담아내지 못하는 내 육감적인 하체도 거뜬한 특대형 생리대는 정말 편했다. 그러니까 결론은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고 거기 가면 다 있다는 것.


본론으로 돌아와서 나는 농장에 있는 3개월동안 캐리어에서 꺼내지 않은 물건들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다시 말하면 한국에서 힘들게 가지고 올 필요는 없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물건들과 더불어 농장 생활을 하면서 늘어난 살림 때문에 도시 지역으로 이사하던 날에는 용달차를 불러야 했다. 호주는 인건비가 정말 비싸다. 게다가 기름값을 생각하면 족히 50만원은 깨질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페이스북 마켓 플레이스에서 200불에 작은 트럭을 가지고 있는 인도 사람을 고용했다.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았지만 저렴하고 편하게 이사할 수 있었으니 다행이었다. 하지만 내가 여느 백팩커들처럼 커다란 가방 하나에 모든 짐을 수용할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 200불이 아니라 20불로 트레인을 타고 시티에 가면 그만일 것이다. 빨래 건조대는 이사할 곳에도 공용 건조대가 있었고 대도시에서는 식료품을 더더욱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식료품 들은 농장 쉐어하우스에 기부하고 오면 그만이었다. 새 집은 고층빌딩이었다. 바닥에다가 짐들을 내려두고 양손에 짐을 두개씩 들어 일단은 엘리베이터 앞에 두었다. 그리고는 쉴 새 없이 오르락 내리락 짐을 옮겨댔다. 등이 땀으로 홀딱 젖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건지 누가 그러라고 한 것도 아닌데 나는 원망할 대상을 찾으며 숨을 골랐다. ‘그래, 짐이 많은건 죄야, 난 전생의 죗값을 지금 치루는거야’


이 도시에서 내가 평생을 살게 될 확률은 현저히 낮고 그렇다면 언젠가는 또 이사를 하거나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겠지. 이토록 많은 짐들은 이동시 내 체력을 갉아먹고,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돈을 더 쓰게 만든다. 비행기를 탈 때만 하더라도 규격과 용량을 초과하면 값을 더 지불해야한다. 짐이 많으면 보다 더 많은 대가를 치루게 된다. 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쓸 것, 언젠가 필요해질 것들을 이고 지고 다니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한다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800km를 걷는 산티에고 순례길에 가면 곳곳에 순례자들이 버리고 간 물건들이 있다고 한다. 순례자들은 흔히들 가방 무게가 인생의 무게라고 하며 짊어질 수 있을 만큼만이 내가 필요한 것들이라고 하는데 나는 단 한번도 내 가방과 인생의 무게를 재본 적이 없었구나. 짊어진 것이 많을수록 더 나아가지 못하게 되고 무게가 무거운 만큼 더 자주 주저앉아야 함을 의미한다. 세상에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없으나 내 가방에 무엇을 얼마만큼 담을 것인지는 오롯이 내가 결정할 수 있다. 내가 배워야할 것은 언어 뿐만이 아니었다. 무엇이 정말로 필요한지부터 얼마나 짊어지고 다닐 것인지 내 삶의 무게를 설정하는 법부터 배워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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