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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루 Oct 02. 2022

7. 일본에서 일한다는 것

7년 차 직장인, 갑자기 일본으로 이주하기

J는 부지런히 이사 준비를 시작했다. 한국과 일본의 장거리 연애는 계속되었고, 재테크를 열심히 하던 J는 본격적으로 부동산 공부를 하며 도쿄의 여러 집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러 다니는 집마다 나에게 집 사진과 도면, 영상까지 보냈다. 그 당시 나는 '본인이 살 집인데 왜 이렇게 자꾸 나한테 보내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때마다 치밀한 J는 나의 생각을 읽는 것인지 '우리가 앞으로 같이 살 수도 있는 집이니까 같이 잘 골라보자.'라는 말을 했다. 얘가 정말 한국에 안 들어오려고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떤 집에 살면 좋을지 보는 일은 재미있었고 일본의 부동산 문화도 접하다 보니 흥미롭게 같이 집을 고르곤 했다.


분명 J의 '일본에 와서 살자.'라는 제안은 흥미로웠지만, 그보다 먼저 현실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였다. 나는 스타트업을 전전하다 드디어 500명이 넘는 규모의 큰 기업에서 안정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기업문화 업무를 2년째 꾸준히 하고 있는 상태였고 이 분야에서는 한국에서 전문가가 되고 싶다는 큰 포부도 있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 이 분야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을 안 했고, 일본어 또한 이제 막 업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마음으로 시작해서 첫걸음마를 뗀 수준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꾸준한 속삭임에 딱히 동요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의 주변에는 실제로 그렇게 일본에서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한 사례들이 있었다.


'내가 같이 일하는 한국인 상사도 30살 넘어서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대.'

'내 친구 여자 친구가 내 친구 따라서 스물다섯 살에 일본에 워홀 왔었는데 지금은 일본에 자리 잡아서 취업도 했더라고.'.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신기했다. 한국에서 열심히 사는 사람들처럼, 해외에서 꿈을 발견해서 또 새로운 도전을 하는 사람들도 있구나. 분명 지금 회사에 입사하기 전 잠시 뉴욕에서 워킹홀리데이 준비를 조금씩 하고 있었는데, 지금 회사에 입사하게 되면서 드디어 내가 바라던 커리어대로 방향성이 잡히는 것이 너무 감개무량하여 해외에서 일한다는 것에 대한 생각을 잊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세상에는 자기의 꿈을 글로벌하게 가져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모두의 시간은 공평하므로 각자가 원하는 커리어와 방향을 위해서 시간과 에너지를 쏟은 만큼 결과가 돌아오는 것이라 생각했고. 20대 내내 치열하게 회사를 옮기고 진로를 위해 고민했던 시간들이 헛되지 않을 만큼, 지금의 자리가 안정적이고 좋다고도 생각했다. 다만, 언제까지고 이 일을 평생 할 수는 없을 것이고 이왕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으니 이것이 나의 새로운 스킬이 될 수 있다면 이 자리에서 영역을 확장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영역을 다른 분야로, 그리고 해외로 확장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어떻게 보면 나는 'J가 일본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해외에서 일하는 기회가 생기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 J가 없었다면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일본에서 일을 해볼까?라는 생각을 죽기 전까지 해보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알게 됨으로써, 타인이 나에게 주는 혼자서는 생각해보지 못했을 생각의 전환은 반가운 법이다. 이럴 때 도전해보는 것도 나의 몫이니까. 당연히 일을 그만두고 가는 건 내 커리어상으로도 안되기 때문에, 일을 지속하면서 해외에서 일하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가장 먼저 내가 재직 중인 회사의 일본 법인에 내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는 TO가 있는지 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일본 법인의 인사팀, 같이 업무 했던 사업기획팀, 채용팀 등등 여러 동료들과 또다시 101을 시작했다. 일단 문을 두드려보는 것이다. 안돼도 상관없다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일본에 있는 동료들이 한국에 들어왔을 때 대면으로, 메신저로, 또 화상 101 미팅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상담을 해가며 TO가 있을지, 내가 커리어를 확장할 수 있을지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현재 일본 기업에는 한국 기업이기 때문에 한국어를 절반 정도는 할 줄 알지만, 어쨌거나 일본 법인이기 때문에 모든 업무를 일본어로 하고 한국어만 할 줄 아는 직원은 거의 아무도 없어 보였다. 단순한 문서 작업 등을 하기에는 어렵지 않았고, 한국인으로만 구성된 팀도 있었지만 보통 일본어를 못하는 한국인은 없었고, 무엇보다 내가 있는 기업문화팀은 일본에 없었다. 그렇다고 인사팀으로 가거나, 이전처럼 콘텐츠 기획일을 일본에서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콘텐츠 기획이라 하면 더욱이 일본어가 필수였기 때문이다. 미팅을 거듭하다 보니 한국인 팀으로만 구성되어 PPT 작업이 위주인 팀에서 지금도 한국인 팀원이 새로 들어오는 것이 환영이라며 JD도 보내주시고 팀장 미팅도 진행했지만. 아무래도 커리어 패스가 연관이 없을뿐더러, 내가 새롭게 배우고 싶은 영역도 아니었기 때문에 정중하게 거절했다. 일본어가 아직 안 된 상태에서, 내가 했던 콘텐츠 기획 업무나 기업문화 커리어 패스를 이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일본 법인으로 전직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 선택지가 될 수 없었다. 처음엔 안되도 상관없지 라는 마음이었으나, 알아보다보니 점점 그 마음이 커져 진심이 되었고 선택지를 잃었을 땐 또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너무 쉬운 길을 선택하려고 한 걸까? 예전에 직장 동료가 얘기해준 것처럼, 일본의 다른 기업을 알아봐야하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 와중에 J는 도쿄에 테라스가 두개가 있는 투룸을 구해 이사를 했고, 도쿄의 다른 회사로 이직을 했다. 평소 그가 너무 일해보고 싶은 금융분야로의 이직이었다. 그의 도쿄 생활이 더 연장되는 순간이었다. 그의 이직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응원했지만 동시에 그가 한국에 오게 될 가능성은 점점 더 희박해졌고, 나의 일본에서 커리어를 이어가는 가능성도 같이 희박해졌다. 차라리 일을 그만두고 마음 편히 J가 이사한 집에 살면서 일본에 가서 일본어 공부를 하거나, 대학원에 다니는 것도 선택지에 있었으나 둘 다 내가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다. 회사에 다닌지는 어느덧 2년이 지나가고 있었고, 회사 안에서도 개인의 역량과 회사 상황에 따라 조직개편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내가 믿고 따르던 사수가 갑자기 다른 팀으로 발령이 나거나. 연차가 오래된 팀장님이 강등이 되거나 하는 일들도 생겼다. 일본어, 이직, 커리어 확장, 회사의 조직개편, 대학원, 그리고 이주까지. 갑자기 평소 생각하지 않았던 다양한 이슈들이 머릿속에 박히기 시작하니 나도 혼란스러웠다. 시간은 야속하게도 JLPT 시험 일자는 다가왔고 퇴근 후 매일 카페에 가서 공부하고 단어를 외우는 것도 일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시험날이 다가올수록 과외의 강도는 더 빡세 졌고, 매일 아침 눈 뜨자마자 컴퓨터를 켜서 온라인 과외를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호기롭게 같이 수업을 듣던 친구는 진작에 그만두고, 영어 과외에 올인을 했다. 과연 나는 일본에서 일을 할 수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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