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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루 Oct 02. 2022

6. 일본에서 살아보는 건 어때?  

7년 차 직장인, 갑자기 일본으로 이주하기


호기롭게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지만, 새로운 언어를 배워보니 걱정이 생겼다. 이렇게 일본어를 열심히 공부하다보면 내 뇌에 잔잔바리로 얕게나마 남아있는 영단어가 사라지는 건 아닐까. 뇌가 담을 수 있는 언어의 총량이 한정되어 있어서 일본어 한 단어 넣을 때마다 영단어 한 단어씩 빠지는 건 아닐지 고민됐다. 유튜브에 '3개 국어'를 검색해보니 여러 콘텐츠가 떴는데 그중에서도 '3개 국어의 단점'이라며 3가지 언어가 모두 머릿속에 엉켜서 0개 국어를 하는 것처럼 됐다고 겁을 주는 영상을 보고 만 것이다. 영어는 대한민국 조기교육의 힘으로 나름 20년 넘게 어떻게든 접하며 공부했을 거고, 교환학생이라는 기회로 6개월은 영어에 친숙하게 지내면서 살아왔는데 이러다가 일본어도 영어도 못하고 한국어까지 헷갈리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0개국어는 최악이지 않나! 이왕 이렇게 된 거 영어 공부도 같이 해야겠다는 생각까지 걱정이 이어졌고, 네이버 오디오 클립 어플에 있는 '오늘의 회화'에서 일본어로 대화 에피소드를 매일 받아 적고, 그걸 또 영어로 작문해보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아직 히라가나만 겨우 읽기 시작한 채로 매일 1개의 에피소드씩 공부했는데, 하다 보니 저절로 눈에 익는 단어도 생기는 것 같고 일본어가 귀에 익는 거 같아 좋았다. 매일 노트에 적고, 다시 블로그로 옮겨 적어 영어로 작문하고 이동 시간에는 오디오 클립을 들었다. 이렇게 100일만 해보면 일본어가 일취월장할 거 같은 기분이었다.

결과는? 딱 열 번 했다. 10일.

[참고] 오늘의 회화 (한국어/영어/일본어) 공부했던 블로그 게시글 : https://blog.naver.com/solloveyou/222489441672 


블로그에 게시글을 매일 올리니 나름의 응원 댓글도 올라오며 도전했지만, 12월에 JLPT라는 목표가 생기고 나니 영어까지 하는 건 아무래도 욕심이었고. 처음에야 3개국어 하는 것처럼 느껴져 재밌었지만 카테고리 자체가 '회화'였기 때문에 단어랑 독해조차 안 되는 내 레벨에서 회화 자체를 공부할 레벨이 일단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또 오디오클립이니 대본이나 정확한 해설이 있는 것도 아니라 야매로 배우는 기분이 들어서 포기. 여기저기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자료를 보고 배우는 것보다 기초부터 좀 탄탄하게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외를 겨우 시작하긴 했지만 중구난방으로 손에 잡히는 대로 공부하려니 머리가 복잡할 지경이었다. 몸은 서두르고 싶은데 오랜만에 펜을 잡으려니 머리는 안 따라오고. 이쯤 내가 쓴 방법은 주변에 일본어를 공부했던 사람들을 모조리 만나고 다니며 조언을 얻어보는 것이었다. 먼저 친한 후배를 만나 일본어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귀멸의 칼날> 애니메이션을 추천받았다. 후배는 대학 시절 방학 동안 오사카에서 친삼촌을 도와 아르바이트를 했던 친구였다. 간단한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친구였는데 일본어 공부에는 일본 애니메이션만 한 게 없다며 추천해준 것이었다. 어린 시절 만화책으로 빌려봤던 <원피스>나 영화관에서 본 <너의 이름은> 같은 애니메이션은 좋아해서 봤지만 <진격의 거인>류의 잔인한, 심지어 18-19세 딱지가 붙은 애니는 꺼렸다. 그렇지만 <귀멸의 칼날>이 한국에 곧 애니메이션 영화로도 개봉한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인기가 있길래?'라는 생각에 1화를 틀었다. 그리고 바로 그 주 주말 동안 시즌을 모두 끝내버렸다. 탄지로.. 이럴 때마다 나의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지에 대해 생각한다. 애니메이션을 너무 빨리 끝내버린 나는 내가 좀 더 좋아하는 연애 리얼리티로 넘어가면 더 일본어를 편하게 습득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테라스 하우스>를 보기 시작했고. 넷플릭스에 올라온 전 시즌을 한 달 만에 다 끝내버렸다. 지금 돌이켜봐도 굉장히 몰입했다. 무서운 일본의 제작 능력.


그리고 회사에서도 일본어를 잘하는 두 명의 동료를 만나 고민상담을 했다. 한 명은 회사 내 일본어 전문 통번역가였고, 다른 한 명은 일본 채용을 담당하는 친하게 지내던 지인이었다. 일본어 공부의 팁, 그리고 일본에서 살 때 어땠는지 등등을 듣기 위해 찾아갔다.


먼저 만난 일본 채용팀 동료와 만났는데, 그 동료는 일본 아이돌을 좋아하기 시작하다 자연스럽게 일본어를 습득한 케이스였다. 내가 JLPT 2급 자격증을 먼저 공부해서 취득하고 일본어를 하다 보면 혹시 업무에도 일본 분야 쪽 업무까지 넓힐 수 있는 기회가 있지는 않을지 이것저것 의견을 얘기했는데 "JLPT 2급? 나도 1급도 없는데."라고 하며 부정적으로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왜 공부하는 거예요? 일본어해서 지금 여기 회사에서 뭐하려고요? 지금 업무랑도 연관 없잖아요. 혹시 일본에 가서 일하려고요? 만약 그런 생각인 거면 일단 우리 회사 일본 지사는 지원하지 마요. 지금 거기 체계 없으니까 차라리 다른 회사 취업하는 게 나아요."라는 조언이 돌아왔다. 지금 하고 있는 업무에서 좀 더 확장을 할 수 있진 않을까 하는 희망을 마음속에 조심스레 품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는데 '그 길은 별로예요.'라는 말을 들으니 김이 팍 새 버렸다. 그날은 내가 일본어 독학을 시작하고, 또 과외를 받기 시작하고, JLPT 2급을 신청하는 과정 중에서 가장 마음이 안 좋은 날이었다.


그리고 그 주에 또 다른 일본어 통번역을 하는 동료를 만나 저녁식사를 같이 했다. 입사 이래로 업무 중에도 일본 통번역이 필요할 때마다 같이 협업했던 동료였다. 언제부터 일본어 공부를 했는지, 요즘 일본어 공부를 하다 보니 영어를 까먹는 건 아닐지, 이러다가 한국어까지 못하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동료는 나에게 단호하게 얘기했다. "다솔님, 언어는 많이 알면 알수록 쌓여요. 인풋이 많으니깐 아웃풋이 많을 수밖에 없죠. 한국어, 영어도 할 줄 아는데 일본어까지 잘하면 그게 더 데이터가 많아져서 언어 습득 속도가 더 빨라져요. 절대 셋 다 못하게 될 거라고 생각할 필요 없어요." 이 동료와 저녁식사를 마친 후, 나는 영어를 괜히 잃어버리는 거 아닐까 라는 걱정이 싹 사그라들었다.


실은 내가 그들을 찾아갔던 이유는 갑자기 들이닥친 일본어 공부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떤 안정감 같은 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나이 먹고 갑자기 일본어 공부를 한답시고 여기저기 들쑤시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건 아닐지, 왠지 서른이 늦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미 늦었다, 공부는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기분이 안 좋았고, "공부할수록 더 잘할 수 있어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반갑고 걱정이 사라졌다. 지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내가 가고 싶은 방향이 어느 쪽인지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나의 마음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일본어 공부 체크리스트 결과>

1. 온라인 일본어 강의 듣기 -> 신청해놓고 3개월 뒤 들어가 보니 수강기간 끝남

2. 주 2회 온라인 일본어 과외받기 -> 숨고 어플 통해 과외선생님 찾음

3. 같이 일본어 공부할 친구 만들기  -> 사교육 중독된 동네 친구 찾음

4. JLPT 시험 신청하기 -> 무리하게 1급 신청했다가 단어에 충격 먹고 2급으로 바꾸기

5. 네이버 오늘의 회화 일본어 매일 1 에피소드씩 공부하기 -> 열흘만에 실패

6. 주변에 일본어 공부해 본 사람들 만나 조언받기 -> 통번역가, 야매로 일본어 배운 친구, 일본에서 아르바이트 살다 온 친구 등 모두 만나기

7. 넷플릭스로 <귀멸의 칼날>과 <테라스하우스> 보기 -> 며칠 만에 클리어



이렇게 우당탕탕 일본어 공부를 시작한 지 3개월쯤, J는 도쿄에서 살던 월세집에서 좀 더 큰 투룸으로 이사를 가겠다고 했다. 10년 동안 원룸에서만 살았었는데 처음으로 투룸으로 가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언젠가 내가 일본에 와서 생활하게 될지도 모르니 더 이상 원룸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J는 얘기했다. "회사에서 일본 쪽 업무를 알아보는 것도 좋고, 그만두고 싶으면 언제든지 그만두고 일본에 와서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지내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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