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지금의 커피가 가장 맛있다

시간의 다방 : 그레이네상스, 다시 피어나는 꽃

by 공감디렉터J


어느덧 수 십여 개의 계절을 건너왔다.
나는 노트북을 덮었다.

<시간의 다방>이라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찍고 나니, 창밖엔 2025년의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파독 광부부터 키오스크 앞의 노인까지. 내가 써 내려간 수많은 주인공들은 결국 나의 분신들이었다.
치열하게 살았고, 아프게 무너졌으며, 그럼에도 다시 일어섰던 대한민국 5060의 자화상.

지친 몸을 일으켜 동네 산책을 나섰다.
비에 젖은 아스팔트 냄새.
골목 모퉁이를 도는데, 소설 속에서 수없이 묘사했던 그 간판이 보였다.

[시간의 다방]


나는 홀린 듯 문을 열었다.
딸랑~
익숙한 종소리. 낡은 소파, 괘종시계, 그리고 은은한 커피 향.
하지만 카운터엔 아무도 없었다.
대신 테이블 위에 커피 한 잔과 쪽지가 놓여 있었다.

[당신의 주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자리에 앉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그리고 옆에 놓인 설탕 그릇과 프림 통.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 강요했던 그 선택지가 이제 나에게 주어졌다.

“작가 양반, 고민되나?”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말을 걸고 있었다.
흰머리가 늘고 주름진 얼굴. 하지만 눈빛만은 깊어진 현재의 나.

“설탕을 넣으면, 20대의 너로 돌려줄게.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 전, 불안했지만 꿈만 꾸면 되던 그 시절로. 다시 시작하면 더 대단한 작품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르지.”

“프림을 넣으면, 미래의 편안한 노후로 점프시켜 줄게. 글 쓰느라 밤새우는 고통 없이, 인세나 받으며 여행 다니는 삶.”

“아무것도 안 넣으면... 넌 내일도 빈 화면과 싸워야 해. 독자들의 평가에 일희일비하고, 체력의 한계를 느끼며 글을 써야 해. 그래도 좋으냐?”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돌아가고 싶은가?
아니. 20대의 나는 너무 뜨거워서 화상을 입을 것 같았다.
미래로 가고 싶은가?
아니. 결과만 누리는 삶은 지루할 것 같았다.

나는 지난 60년을 돌아보았다.
가난했던 유년, 치열했던 청춘, IMF의 시련, 그리고 디지털 세상에서의 적응기.
그 모든 시간이 지금의 내 문장을 만들었다.
상처는 굳은살이 되었고, 눈물은 잉크가 되었다.
설탕의 달콤함도, 프림의 부드러움도 아닌, 인생 본연의 쓰고 깊은 맛을 알게 된 지금.
나는 지금의 내가 가장 좋다.

“이봐.”

나는 거울을 향해 미소 지었다.

“난 블랙이 좋아. 설탕도 프림도 필요 없어. 지금 이 쓴맛이, 내 인생에서 가장 깊은 풍미를 내고 있거든.”

나는 커피 잔을 들었다.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검고 투명한 액체.
한 모금 마시자 온몸에 따뜻한 기운이 퍼졌다.
그것은 '살아냄’에 대한 자부심이자,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한 기대감이었다.

“역시, 자네답군.”

거울 속의 내가 윙크를 했다.


다방의 풍경이 서서히 흐려지더니, 나의 서재로 변했다.
책상 위엔 방금 탈고한 원고 뭉치가 놓여 있었다.

<시간의 다방: 설탕, 아니면 프림?>

나는 원고 위에 손을 올렸다. 따뜻했다.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특히 나와 같은 시대를 건너온 5060 친구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우리의 계절은 저무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고.
당신의 커피 잔에는 아무것도 넣지 않아도 좋다고.
지금 그대로, 당신은 충분히 훌륭한 향기를 내고 있다고.’


나는 창문을 열었다. 비가 그치고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어디선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은 여전히 시끄럽고 불완전하지만, 그래서 더 살만한 가치가 있다.

나는 새 종이를 끼웠다.
이제 소설이 아닌, 나의 진짜 두 번째 인생을 쓸 차례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될 것이다.

“오늘, 커피 맛이 참 좋다.”




[작가 노트]
40편의 대장정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화는 작가가 직접 등장하여 시리즈의 메시지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과거(설탕)와 미래(프림)의 유혹을 뿌리치고, 고통과 기쁨이 공존하는 현재(블랙)를 긍정하는 결말이야말로 ‘액티브 시니어’ 정신의 정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상처는 굳은살이 되었고, 눈물은 잉크가 되었다"는 고백을 통해, 5060 세대가 지나온 삶의 궤적을 긍정하고 위로합니다. 이 소설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따뜻한 커피 한 잔 같은 휴식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