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햄버거 하나 주문하기가 전쟁이다

시간의 다방 : 그레이네상스, 다시 피어나는 꽃

by 공감디렉터J


“주문하시겠습니까?”
점원의 목소리가 아니다. 차가운 기계음이다.
이종수(69세) 씨는 패스트푸드점 키오스크 앞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뒤에 줄을 선 젊은이들의 시선이 등 뒤에 꽂히는 것 같았다.
‘화면을 터치하세요.’
눌렀다. ‘매장에서 식사/포장’. 눌렀다.
그다음부터가 문제였다.
‘세트/단품’, ‘사이드 변경’, ‘음료 선택’, ‘쿠폰 적립’, ‘포인트 사용’...
깨알 같은 글씨, 복잡한 단계. 시간 초과로 화면이 초기화되자 종수는 울고 싶어졌다.

“저... 그냥 불고기 버거 하나 주세요. 현금으로.”
카운터로 가서 말했지만, 직원은 "주문은 키오스크에서 해주세요"라며 손가락으로 기계를 가리킬 뿐이었다.
소외감. 내 돈 내고 밥 먹겠다는데, 세상이 나를 밀어내는 기분.

터덜터덜 가게를 나와 벤치에 앉아 있는데, 맞은편에 낯선 자판기 하나가 보였다.
[시간의 다방 - Order Here]


자판기 옆엔 알바생 유니폼을 입은 청년이 서 있었다.
그는 종수에게 다가와 90도로 인사했다.

“고객님, 주문 도와드릴까요?”

청년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종수는 안도감에 한숨을 쉬었다.

“아이고, 고맙네. 그냥 따뜻한 커피 한 잔만 줘.”

“네, 그럼 옵션을 선택해 주세요.”

청년이 쟁반을 내밀었다. 스마트폰과 지폐, 그리고 커피.

“스마트폰을 고르시면, 2030년의 미래 기술을 미리 드립니다. 뇌파로 주문하고, 말만 하면 AI가 다 알아서 해주는 세상. 키오스크 앞에서 쩔쩔맬 필요 없이, ‘커피 줘’ 한마디면 드론이 배달해 줍니다.”

“지폐를 고르시면, 아날로그 시대로 되돌려 드립니다. 사람이 주문받고, 현금 내고 거스름돈 받는 그 시절. ‘여기 짜장면 하나요!’ 외치면 되는 편한 세상으로.”

“아무것도 고르지 않으시면... 어르신은 다시 저 키오스크 앞에 서셔야 합니다. 뒤에 선 사람들 눈치 보며, 돋보기 쓰고 하나하나 눌러가며 배워야 합니다. ‘틀딱’ 소리 안 듣고 '디지털 노인’이 되기 위해 공부해야 합니다.”

종수는 지폐를 집으려 했다.
사람 냄새나는 세상이 그리웠다. 기계 따위랑 씨름하기 싫었다.

하지만...
종수는 며칠 전 손주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할아버지, 나랑 영화 보러 가자! 내가 예매해 줄게.”
손주는 스마트폰으로 뚝딱 표를 예매하고, 팝콘도 샀다.
내가 배우지 않으면, 나는 손주의 세상에 들어갈 수 없다. 영원히 짐짝 취급을 받거나, 고립될 것이다.
그리고... 저 키오스크 앞에서 포기하고 돌아서는 내 뒷모습이 너무 처량하지 않은가.

“학생.”

종수는 지폐를 내려놓았다.

“나 안 돌아가. 배우면 되지, 뭐. 내가 왕년에 영어 단어도 외우고 다 했는데, 저거 하나 못 하겠냐.”

“어려우실 텐데요. 또 실패하실 수도 있고요.”

“실패하면 다시 하지. 내 뒤에 사람 있으면 ‘먼저 하슈’ 하고 비켜줬다가 다시 하면 돼.”

종수는 블랙커피를 들었다.

“그리고... 내가 배워서 우리 마누라한테도 알려줘야 해. 나보다 더 겁이 많거든.”

종수는 커피를 마셨다. 쓴맛이 정신을 깨웠다.

“멋지십니다, 고객님. 그 용기가 바로 최신형 OS입니다.”

청년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제가 팁 하나 드릴게요. 화면 글씨 크기 조절 버튼이 구석에 있어요.”


자판기가 사라지고, 다시 패스트푸드점 앞.
종수는 심호흡을 하고 다시 들어갔다.
키오스크 앞에 섰다. 뒤에 청년이 서자 종수가 먼저 말을 걸었다.
“학생, 미안한데 내가 좀 느려. 먼저 할래?”
청년이 웃으며 말했다.
“아뇨, 천천히 하세요. 괜찮습니다.”

종수는 돋보기를 꺼내 썼다. 천천히, 또박또박 눌렀다.
[주문이 완료되었습니다.]
영수증이 나오는 소리가 승전보처럼 들렸다.
종수는 영수증을 훈장처럼 쥐고 자리에 앉았다.
오늘 먹는 햄버거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성취감’의 맛일 것이다.




[작가 노트]
디지털 소외 계층인 노년층이 겪는 '키오스크 공포증’. 주인공 종수는 과거의 편안함으로 도피하는 대신, 불편함을 감수하고 배우려는 의지를 선택합니다. "내가 배워서 아내에게 알려줘야 한다"는 책임감과, 젊은이에게 양보하며 다시 도전하는 모습은 5060 세대의 품격을 보여줍니다. 디지털 격차를 해소하는 것은 기술의 발전뿐만 아니라, 기다려주는 사회적 배려와 배우려는 개인의 용기가 함께할 때 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본 소설은 허구이며, 등장하는 인물, 단체, 지명, 사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