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번째 순간
밤사이 비가 내렸던 모양인지, 거리는 축축이 젖은 채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은 비를 떠올릴 수 없을 만큼 쾌청하다. 부쩍 차가워진 공기를 코로 깊게 한번 들이마신 뒤, 언제나처럼 같은 길을 걷는다. 행여 방향을 잃진 않을까 늘 긴장하며 걷던 길은 어느새 눈을 감고도 선연히 그릴 수 있을 만큼 익숙한 것이 됐다. 두 번째 봄과 두 번째 여름을 보내고, 두 번째 가을을 지나는 지금. 아닌 척하지만 나는 조금 무뎌져 있다. 이 눈부신 날에, 나는 조금 무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