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네 번째 순간
색채가 없는 대지 위로 가냘픈 눈송이들이 층층이 쌓여 있다. 그중 어떤 눈송이 위로 희미한 날빛 하나가 날아든다. 부시게 혹은 시리게. 빛을 껴안는 법을 모르는 눈송이는 그 작은 온기 하나를 견디어내지 못하고 제가 머물던 자리에서 자취를 감추고 만다. 그건 빛의 잘못도 아니고 눈송이의 잘못도 아니며 계절의 잘못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그저 순리라 해야 할 것이다. 눈송이를 닮은 연약한 우리의 마음이, 어디선가 날아든 빛 한 줄기로 인하여 설령 형태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녹아내린다 하더라도, 그래서 마침내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만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마음의 탓이 아니다. 빛의 탓이거나 계절의 탓도 아니다. 그저 순리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