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이면_씨부라파

현실과 시간 앞에선 속수무책인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by 무병장수

우연히 접하게 된 태국 국민 작가, 씨부라파. 필명인데 어감이 강렬하다. 욕하고 싶은 사람 면전에서 그의 이름을 읊조리다가 상대가 화내면 당황하지 않고 “태국 국민 작가 씨부라파를 모르니?”라고 수동공격을 해도 되겠다는 어이없는 생각을 혼자 하며 키득거리면서 책장을 열었다. 이 책은 30대 초반이던 작가가 6개월간 일본에 체류한 경험을 바탕으로 1936년부터 13개월간 일간지에 연재한 사랑이야기를 엮은 장편 소설이다.


연상의 왕족 출신 유부녀인 끼라띠 여사와 일본 유학생 연하남 놉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이별 이야기가 놉펀의 시선에서 전개된다. 일본과 태국이라는 이국적인 공간을 그려보면서 그 시절 교양 있는 사람들 특유의 진지하면서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표현 방식을 읽을 수 있는 것이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즐거움이다. 특히 걷잡을 수 없이 끌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대책 없이 일방적으로 절절히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고통받다가 식어버리는 놉펀과, 차마 그의 사랑을 대놓고 받아들일 수 없는 처지인 여사가 놉펀에게 어른스러운 충고를 하면서 그를 밀어내고 동시에 그가 선을 넘어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끼라띠 여사의 양가적인 모습은 현실과 시간이라는 벽 앞에서 남녀 간의 열정적인 사랑이 어떻게 변질되는지, 외현적으로 드러나는 사랑의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생각하게 한다.


사랑이 없더라도 행복이 주는 안정감 속에서 내가 가진 것을 누리며 사는 것이 행복 없는 사랑을 갈망하고 근심하는 것보다 나을 거라고 말하던 끼라띠 여사는 놉펀과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희망이 좌절되자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 없이 죽는다. 하지만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족하다”라는 글을 남기고 죽는다.


현재 내가 가진 것이나 과거에 잠시라도 가졌던 것을 회고하며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가질 수 없는 것이 나에게 찾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대하면서 불확실한 희망을 붙잡는 것. 응답 없이 지속되는 불확실한 희망을 놓지 않는 것은 나를 서서히 죽이는 독약이 된다. 변화를 위한 용기를 내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실제로 행동하고, 그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어쩔 수 없는 고통까지 기꺼이 감수할 수 없다면 그 희망은 사실은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단지 좌절된 욕구가 남긴 망상일 수 있다.


이제 그만 놓아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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