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포레스트> 보늬 밤 조림 만들기
여러 차례 가다 보면
다른 길을 개척하기도 하고,
꽃 구경하며 넋 놓고 걷다가도
목적지에 도착한다.
요리도 그렇겠지.
변수에도 꿋꿋이 밤 조림을 만들고 있다. 갑작스런 외출로 밤을 까다가 중단하고 방치한 채 나갔다 왔다. 나갔다 오니 피곤해서 초저녁 잠을 잤더니 마트도 문을 닫아 베이킹 소다를 사 오지 못했다. 절반 정도 깠던 밤을 야밤에 마저 까고… 거기에서 요리는 중단! 베이킹 소다가 없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없다. 어쩔 수가 없다. 내일 이어서 해야지.
이런 일을 만나고 보니, 음식을 만들 때도 ‘되는 대로’ 유연하게 대처해도 괜찮다는 마음이 든다. (물론 음식이 상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상황이 안 될 것 같으면 애초에 시도조차 하지 않고 포기했었는데…. 이제는 일단 시작하고, 여건에 맞게 만들어 나가도 된다는 지혜를 나름, 얻은 느낌이다.
아침에 밤을 깔 때는 처음이라 요령도 없고 홀로 밤만 까느라 적막했다. 집중하다 보니 시간도 잘 가고 나름 재밌기는 했지만… 심야에도 그렇게 까자니 조금 내키지 않았다. 톡톡 스마트폰 화면을 두드려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잘 불린 밤을 통화하며 슬슬 까다 보니 어느새 남은 밤톨이 없다. 엄지 검지가 물기에 쪼글쪼글해진 것은 덤!
“냉장고에 넣어 놔야 하나?”
하고 물으니,
“그렇지. 설탕물에 담가서. 깐밤은 그래야 안 쉬어.”
라는 엄마의 꿀팁 전수!
전화를 끊은 뒤, 냄비에 따뜻한 물을 담아 설탕을 풀고 그 위로 밤을 붓는다. (그 덕에 설탕도 부족해 내일 베이킹소다와 함께 구입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속껍질이 남아 옅은 갈색인, 몽실한 솜털도 살짝씩 붙어 있는 밤알들이 물속에 잠긴다. 냄비를 들고 살살 흔드니 기분 좋게 달그락거린다. 겉껍질이 남아 있을 때처럼 맑고 큰 소리는 없지만, 은근한 진동이 냄비를 들고 있는 손에 전해진다.
지금 만들고 있는 음식은 밤 조림, 일명 보늬 밤이다. (나는 ‘보늬 밤 조림‘으로 부르겠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본 사람들이라면 접했을 음식이다. 배우 김태리 주연의 <리틀 포레스트>가 개봉했을 당시, 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면서 ‘앗! 저건 정말 먹어 보고 싶다.’ 했던 요리가 바로 밤 조림이었다. 그 장면이 무척 인상 깊이 남았던 이유는 또 있다. 바로 내가 만들지 못할 것 같은 음식…이라 영원히 못 먹어 볼 듯했기 때문이다. <리틀 포레스트>를 보면, 음식을 먹는 그 순간뿐 아니라 만들어 가는 과정도 맛의 일부가 되는 듯하다. 그렇기에 완제품 밤 조림을 어디서 사 먹는다 해도… 영화 속에서 본 그 밤 조림, 내가 먹고 싶어 군침을 삼키던 그 음식은 아니리라.
예상과 달리 지금은 보늬 밤 조림을 만들고 있다. 엄두도 나지 않던 요리를 하고 있다니! 신기하다.
이렇게 한번 해 보면 다음에 또 할 수 있을 듯한 자신감도 든다. 요리는 경험치. 만들어 보고 아니고의 차이는 크다. 일단 한번 만들어 본 요리는 다음 번에 다시 만들 때 부담감이 덜하다. 또 비슷한 요리를 만들 때 응용되기도 한다. 마치 길과 같다고나 할까. 처음 가는 길은 낯설지만, 일단 한 차례 다녀오고 나면 방향 감각이 생긴다. ‘저 방향에 카페가 있었지. 이쯤에서 좌측으로 꺾었던 듯한데. 횡단보도를 두 번 건넜지.’처럼 예상할 수도 있다. 여러 차례 가다 보면 다른 길을 개척하기도 하고, 꽃 구경하며 넋 놓고 걷다가도 목적지에 도착한다. 요리도 그렇겠지.
직접 만들 수 있는 음식이 하나 둘 늘어날 때마다 내 몸의 영역도 넓어지는 기분이다. 이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나기 때문이리라. ‘보늬 밤 조림’은 아직 만드는 중이고, 보늬(밤이나 도토리 따위의 속껍질을 이르는 말)만 남은 밤은 계획과 달리 설탕물을 덮고 냉장고 안 냄비 속에서 잠자고 있지만 말이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해도 만들어 가는 이 경험은 내 몸에 확실히 축적될 테다. 인터넷에서 찾은 레시피에는 없는, 설탕물에 담가 재우는 과정이 추가되어 걱정이긴 하지만… 어차피 나중에 베이킹 소다에도 재우고 물에 씻고 설탕 붓고 끓이기까지 할 예정이니, 큰 문제는 안 되리라 믿어 본다. 그 작은 믿음이 없으면 진행도 어려울 테니!
자, 이제 남은 일은 내일의 나에게 맡기고, 이불 덮고 자러 가자. 자고 일어나서 만나자, 보늬 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