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깊어질수록 맛도 깊어지는 보늬 밤

보늬 밤 조림 만들기 2

by 이솔지
지난 겨울은 심적으로 몹시 힘들었다.
올가을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자마자 미리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내 마음을 미리 보살피기 위해,
다가오는 겨울이 두렵지만은 않도록 안전 장치 하나를 마련했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음식
‘보늬 밤 조림’ 덕분에 마음 한켠이 든든하다.



보늬 밤 조림을 완성했다. 장장 사흘이 걸렸다. 원래는 이틀이면 완성할 수 있었을 텐데, 몇 가지 변수가 겹치면서 더뎌졌다.

월요일에서 화요일로 넘어가는 새벽, 저녁에 마신 커피 탓인지 잠이 오지 않아 밤을 불렸다. 이 또한 날짜에 포함한다면 나흘이 걸렸다고 볼 수도 있겠다. 밤을 불릴 때는 소금물에 담가 두어야 한다. 담그는 시간은 레시피마다 서로 달랐다. 최소 십 분에서부터 최장 여섯 시간까지! 잠을 자야 했고, 피곤한 몸에 익숙하지 않은 손놀림으로 밤을 까다가 다칠 수도 있으니 오래 불리기로 했다. 그렇게 하룻밤을 불렸다.

다음 날인 화요일 아침, 여섯 시간 가량을 재운 밤을 꺼냈다. 물에 헹구고 채반에 받쳐 물기를 뺀 뒤 식탁으로 옮겼다. 쟁반과 냄비, 과도도 함께.

그때서야 밤 깎는 전용 칼이 떠올랐다. 하지만 요리 초심자에게 그런 물건이… 있을 리가!! 없지. 어쩔 수 없이 과도로 밤을 까야 한다. ‘이거… 어떻게 까?’ 난감했지만, 소금 물에 불렸기 때문에 밤이 잘 까지더라는 후기들을 믿으며 맨들한 밤 껍질에 칼집을 내 본다. 쭉-! 하고 물기를 물총처럼 뿜어내는 밤. 아, 이 정도로 세게 누르면 안 되나 보다 하고 깨닫는다.

처음에는 칼질이 무서워서 손톱에 힘을 주며 껍질을 깠다. 밤은 잘 까졌지만 지속 가능한 방법은 아니었다. 손톱 밑으로 밤 껍질 잔해들이 파고들어 엄지 밑이 까매진 데다, 손톱과 살 사이가 벌어졌는지 조금 아프끼까지 했다. 최대한 칼을 활용해야 했다.

계속하다 보니 요령이 생겼다. 뾰족한 밤 꼭지 부분을 향해 칼날을 살짝 밀어 넣는다. 그러면 밤 꼭지 부분에 갈라진 틈이 생긴다. 그 틈으로 손톱이나 칼날을 밀어넣으며 벗기면 겉껍질이 쉽게 벗겨졌다. 까다 보니 어떤 밤이 잘 까질 밤인지 알아보는 감식안까지 생겼다. 밤 꼭지 위로 실밥이 튀어나오듯, 아기 공룡 둘리의 머리털처럼 꼭지가 남아 있는 밤. 그런 밤부터 먼저 골라내 깠다.

밤을 절반 정도 까고 외출했다 돌아온 뒤 나머지 절반을 깔 때는 보다 숙련된 솜씨로 겉껍질을 벗겨낼 수 있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속껍질, 곧 ‘보늬’만 남은 밤들을 만났다. 아마 밤 조림을 만들지 않았더라면 볼 일이 없었을 모습. 밤은 참 껍질이 많은 열매다. 뾰족뾰족한 고슴도치 같은 껍질을 벗겨내면 단단하고 맨들맨들한 도토리 겉면 같은 껍질이 나오고, 그것마저 벗기면 솜털과 실로 덮인 듯한 부드러운 속껍질이 등장한다. 속껍질만 남은 밤의 집합은 처음 보았다. 늘 반들반들한 겉껍질이 있는 모습만 봤을 뿐이다. 밤이라면 통째로 쪄 먹거나 삶아 먹는 정도로만 알던 내게 ‘보늬 밤 조림 만들기’는 그 자체로 도전이었다. 그러나 이 도전 덕분에 ‘보늬’라는 예쁘고 부드러운 말을 알게 되었고, 밤의 속껍질들도 마주하게 됐다. 무척 값어치 있는 시도였다.

겉껍질을 모두 벗긴 뒤에 할 일은 식용 베이킹소다에 담가 두기였다. 그러나 보늬 밤들을 마주하고 나니, 자정이 훌쩍 지난 시간이었다. 집에는 청소용 베이킹소다만 있을 뿐. 엄마의 조언에 따라 설탕물에 담근 채 잠들었다. 다음 날, 식용 베이킹소다를 사기 위해 마트 두 군데를 돌았다. 베이킹소다라고 적힌 재료는 찾지 못했고, 거의 같은 성분이라는 식소다를 사 왔다. 검색해 보니 같다고 하는 의견도, 조금 다르다고 하는 의견도 있는데 무엇이 맞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식소다가 좀 더 쓴 맛이 난다고 하는 글을 봤는데, 보늬 밤 조림에는 설탕도 많이 들어가기 때문인지 완성하고 나니 쓴 맛 없이 달달했다.

베이킹소다 푼 물에 밤을 담가 두는 시간을 어떤 사람은 삼십 분, 어떤 사람은 여섯 시간 이상이라고 했다. 느긋하게 만들고 싶어서 여섯 시간가량 담가 두었다. 그런 뒤 밤을 흐르는 물에 세 번 정도 헹구고(헹구지 않아도 된다.) 물과 함께 냄비에서 끓이다가 흑설탕을 부어 함께 끓였다. 흑설탕의 양은 손질한 밤 무게의 절반 정도로 했다.

보늬 밤 조림이 완성되어 가는 사이, 유리 병을 소독하고 말렸다. 다 된 밤 조림을 유리 병 안에 담으면서, 밤 모양이 깨진 것들은 따로 그릇에 모아 맛보기용으로 빼냈다. 밤 조림은 세 달 정도 숙성하면 더 맛이 좋다고 하니, 천천히 숙성시키며 먹으려고 한다. 밤을 꺼내 먹기 아깝다면 시럽만 몇 숟가락 퍼서 우유에 섞어 먹어도 좋다. 아주 달달하고 진한 홈메이드 밤 라떼가 되니까. 이따금 한두 알씩 빼 먹으면서, 숙성을 기다리고 맛의 변화를 느껴도 재미있겠지. 완성하고 난 뒤로도 점점 더 깊어지며 완성되어 가는 요리라니, 왠지 마음이 푸근해진다.


지난 겨울은 심적으로 몹시 힘들었다. 일조량이 줄어가면서 계절성 우울감을 느꼈는데, 그 정도가 심했다. 그런 내 마음을 미리 보살피기 위해, 다가오는 겨울이 두렵지만은 않도록 안전 장치 하나를 마련해 두었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음식 ‘보늬 밤 조림’ 덕분에 마음 한켠이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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