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도 가도 왕십리, 그 안에서 진짜 울고 있는 존재는

시 읽고 쓰는 글 - 김소월, <왕십리>

by 이솔지


#1 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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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십리​


김소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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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 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

웬걸, 저 새야

울려거든

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 다오,

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천안에 삼거리 실버들도

촉촉히 젖어서 늘어졌다데.

비가 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구름도 산마루에 걸려서 운다.



#2 시 읽고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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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도 가도 왕십리,

그 안에서 진짜 울고 있는 존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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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떠난 날로부터 줄곧 비가 오고 있어. 이 비는 언제까지 내릴 생각일까. 이따금 너를 생각하며 산책을 하는데, 그 길에는 네가 없고 비만 있네. 내리는 빗속에서 같이 걷던 날들을 생각해.


처음 우리가 만난 날에 너는 까만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어. 그 눈에 빠져서 너를 보고 있지 않은 날이면 늘 네 생각을 했지.


네가 그렇게 깊이 내 마음에 자리잡게 될 줄을, 너와 함께 살기 전까지는 몰랐어. 하지만 너를 우리 집에 데려온 날 바로 직감했지.


내 인생에서 너는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겠구나. 네가 떠나고 난 뒤 나는 오래 힘들겠구나. 그런 생각 아닌 생각들이, 예감이 나를 휘감았어.

너를 씻기며 알았어. 네 털은 원래 새하얗구나. 그동안 얼마나 홀로 외롭게 거리를 쏘다녔으면 그렇게 누래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팠어.


커다란 하얀 차가 지나갈 때마다 그 꽁무니를 쫓아가던 네 모습을 볼 때 아찔했지. 횡단보도 앞에서 빙빙 도는 이상한 모습 때문에 걱정이 됐고, 나는 어느새 얼굴도 모를, 어떤 크고 하얀 차를 탔을 인간을 원망하고 증오했어.


자기를 버린 인간을 원망할 줄도 모르는, 애처로운 생명을 방치했기에. 또 여전히 그 인간을 찾던 너의 모습을 알기에, 알 수 없는 그 사람에 대한 미움은 더욱 깊어져 갔지.


이미 지병이 있었고, 노견이었기 때문에 오래 살 수 없으리란 건 알고 있었어. 그럼에도 이별은 쉽지가 않았어. 아픈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가장 가슴 아팠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이 그렇게 가슴에 사무친 적이 없어. 네가 앓기 전에는, 너를 잃기 전에는.

걸어도 걸어도 걷고 또 걸어도 비는 계속 내려. 네가 죽던 그날처럼. 네가 더 이상 울지 않던 그날처럼. 그렇게 걷던 중, 시 한 편이 떠오른 거야.


왕십리. 실제 지명도 있지만, 왕십리라는 한자를 풀면 이렇다. 갈 ‘왕’, 열 ‘십’, 거리의 단위인 ‘리’. 1리는 약 0.393킬로미터라고 하니, 10리라면 약 3.939킬로미터가 되겠지.


그렇다면 ‘왕십리’는 ‘십리를 가다’인 걸까. 하지만 시를 보면 “가도 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라는 구절이 있어 혼란스러워. ‘가도 가도 십리뿐’이라는 의미도 되지 않을까. 아무리 가도, 또 가도 십리를 벗어날 수가 없는 거야.


마치 지금의 내가 아무리 걸어도 너를 둘러싼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슬픔의 공간인 십리 속에서 계속 비를 맞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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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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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연에서는 4행에 걸쳐 비가 ‘온다’는 사실을 ‘온다, 오누나, 오는, 올지라도’라고 변주하며 읊조리는데, 그래서 자연히 내가 이 빗속에 있음을 자각하게 돼. 빗속에 갇혀 있는 느낌이 들어. 그리고 드는 생각.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닷새 정도 충분히 오면 좋겠다는 걸까, 아니면 닷새만 오고 그만 그치라는 걸까. 사실 나의 경우는 후자였어. 너를 잃은 고통 속에서 닷새 이상 갇혀 있고 싶지 않았거든. 하지만 그후 곧바로 드는 생각.


닷새, 겨우 닷새라니. 너를 잃었는데 닷새만 괴롭다니, 그건 말이 되지 않을 것 같았어. 그렇다면 사실, 닷새도 충분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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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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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온다고 한 걸까. 그래도 이 시의 화자에게는 올 수 있는 사람이 있겠네. 나의 너는, 결코 올 수가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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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하루 삭망이면 간다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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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그 약속과 달리, 화자의 그 사람은 오지 않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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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도 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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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오는 것은 비뿐이야. 시의 화자가 기다리는 사람도, 내가 원하는 너도 아닌. 적어도 그 점에서만큼은 나와 화자가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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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걸, 저 새야
울려거든
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 다오,
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새가 우는 모습을 보고 왜 건너가서 울어 달라고 했을까. 왕십리를 건너가면 누가 있기에. 혹시 화자가 바라는 그 사람이 있는 걸까. 그렇다면 나도 부탁하고 싶다. 무지개다리를 건너간 너에게 닿아 달라고. 거기 가서 울어 달라고. 나 대신에, 너에게 가 달라고. 하지만 비가 오고, 비에 맞아서 벌새는 맥이 풀려 있다. 고단하기에 왕십리를 건너갈 기운조차 없다. 그래서 새는 가지 못해 운다. 화자의 그 사람에게도, 나의 너에게도 가지 못해서. 사실 그 울음은 벌새의 울음이 아닌, 나와 화자의 울음인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가도 이 왕십리를 벗어날 수 없는 우리의 운명에 대한 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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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에 삼거리 실버들도
촉촉이 젖어서 늘어졌다데.


비 때문에 늘어진 건 새뿐이 아니다. 실버들, 그러니까 수양버들도 촉촉이 젖어 늘어져 있다. 힘없이, 혹은 머리 푼 귀신처럼, 한맺힌 존재처럼. 버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비에 맞아 축 늘어지고 바람에 흔들리면서 맺힌 물방울을 후득후득 떨어뜨리는 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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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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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반복하는 읊조림. 비가 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이 연을 읽을 때, 우리는 다시 첫 연으로 돌아가게 된다. “비가 온다 / 오누나 / 오는 비는 /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라는 첫 연의 감각을, 기억을 다시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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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도 산마루에 걸려서 운다.



​그래, 사실 그렇다. 이 시 전체에서 화자는 한번도 스스로 울지 않는다. 직접적으로 운다고 표현된 건 새와 구름뿐. 그러나 이제 조금 솔직해져 보자. 진짜 우는 게 누구인지, 생각해 보자. 새는 원래 지저귀고, 그 지저귐으로 소통한다. 구름이 산마루에 걸린 것도 비가 올 때 나타나는 자연 현상일 뿐이다. 그렇다면 진짜 울고 있는 존재는 새도 구름도 아닌, 그것을 ‘운다’고 말하고 ‘우는 것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 곧 시의 화자다.

그래, 솔직해지자. 이 글을 쓰며 진짜 하고 싶은 말, 이 시를 읽으며 정말 표현하고 싶었던 감정. 그건 시에 대한 이야기도, 시 속의 화자나, 인간의 근원적 고독을 말한다는 시인의 의도나 주제도 아니다. 다만 너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너와 나의 이별, 너를 더 이상 이 세상에서 품을 수 없다는 슬픔. 쓰다듬으면 손가락 사이에 파고들던 희고 부드러운 털의 감촉을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너의 울음을 다시 들을 수 없다는 그 괴로움, 고통. 사실 그것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내 내면 깊이 자리한 그 심리 때문에 이 시를 선택하고, 이 시에 대해 말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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