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선택하지 않은 삶이 나를 흔들어 댈지라도

[책리뷰] 주기율표 / 프리모 레비 / 돌베개

by 솔솔부는 책바람

서로 자라온 배경이 달라서 우리에겐 "서로 맞바꿀 물건" 이 많았다.

마치 서로가 모르는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온 상인들의 만남과 같았다.


주기율표 p.62


어느덧 독서모임을 시작한 지 3년 차에 접어들었다.

매일 새벽 5시 30분부터 7시까지,

때로는 그 시간을 훌쩍 넘기면서까지 같은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제는 독서모임의 선배님들이 아주 친한 친구처럼 느껴진다.


어쩌다 보니 올해 상반기에는 새 온독 회장을 맡게 되었고 특히 이번에는 '테마가 있는 책장' 구성을 시도하면서 책 선정과 분류, 읽을 시기 등을 결정하는데 더욱 신경을 써야 했다.

주제별, 작가별 구성을 선배님들의 일정을 고려해야 했기에 어느 때보다 세심하고 체계적인 계획이 필요했다.


새온독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자신이 추천한 책으로 리더가 되어 독서 모임을 진행하는 것이다.

리더는 선택한 책과 관련된 영상과 질문을 준비해 새벽 시간에 '온라인 줌'을 통해 모임의 문을 연다.


올해 1월 첫째 주와 둘째 주에는 '우리에게 철학이 필요한 이유'라는 테마로 니체와 쇼펜하우어 아포리즘이 담긴 책을 읽었다.

이번 주에는 내가 리더가 되어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를 함께 읽고 있다.






글을 쓰면서 그것이 식물처럼 자라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역설적이게도 가혹했던 기억의 짐이 재산이 되었고 씨앗이 되었다.


주기율표 p.226


프리모 레비는 유대계 이탈리아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파시즘 저항운동을 하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의 대표작에는 '이것이 인간인가'가 있다.




다음날 운명은 나를 위해 색다르고 놀라운 선물을 준비해두고 있었다.


주기율표 p.225


레비는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이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인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의 삶이 오로지 아우슈비츠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는 것이 아쉽게 느껴졌다.

아우슈비츠의 경험이 그의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던 것은 분명하지만 나는 그가 살아온 일상적인 순간들, 인간적인 고민과 기쁨에도 주목하고 싶었다.


예전에 '이것이 인간인가', '주기율표'를 모두 읽었지만 이번에는 '주기율표'를 통해 레비의 삶을 새롭게 조명하고 싶다.

이 책은 레비가 경험한 세계를 원소라는 독창적인 틀 안에서 풀어낸 작품이다.

나는 이를 통해 단순히 유대인 피해자로서가 아닌 과학자로서의 열정과 인간적인 면모까지 함께 살펴보고자 했다.




즉 거의 같은 것(나트륨은 칼륨과 거의 같다. 하지만 나트륨을 썼더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실질적으로 같은 것, 유사한 것, '혹은'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것, 대용품, 미봉책은 믿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차이는 아주 작을지 몰라도 결과는 엄청나게 다를 수 있다.

마치 철도의 선로 변환기처럼 말이다.


주기율표 p. 93


작품은 제목에 걸맞게 21개의 원소를 통해 레비의 삶을 복원하며 그 속에 담긴 기억과 사색을 풀어낸다.

그런데도 이 작품이 에세이가 아닌 소설로 분류된 점이 흥미로우면서도 의문을 자아냈다.

책 속에는 판타지나 우화 형식의 몇몇 작품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작가가 실제 경험과 문학적 상상력을 섞어 서술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원성을 피하고자 소설이라는 형식을 선택한 것인지 그 이유를 나름대로 추측해 보는 것도 재미가 있었다.




이들은 정말로 활성이 없어서, 그러니까 자신들의 처지에 만족하고 있어서 어떤 화학반응에도 개입하지 않고 다른 원소와 결합하지도 않는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비활성 기체는 수 세기 동안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주기율표 p.7


첫 번째 장인 '아르곤'에서는 레비의 유대인 가족과 이웃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가 성장한 환경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그의 조상과 가족들이 보여주는 유머러스하고 개성 넘치는 모습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유대인의 이미지와는 사뭇 달라 흥미롭고 재미있게 읽힌다.


'철'에서는 이탈리아인으로서의 살아온 레비가 파시즘과 인종법 시행으로 인해 '불순물'로 분류되어 가는 과정을 묘사한다. 동시에 비유대인 친구 산드로와의 우정을 통해 인간적인 연대와 연결을 보여준다.


'수소'에서는 레비의 청소년 시절을 보여주며 화학에 대한 그의 학문적 열정과 꿈이 드러난다.


'니켈'에서는 토리노 대학의 화학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일자리를 얻지 못했던 좌절이 담겨 있다. 결국 그는 신분을 속이고 비밀스러운 업무에 참여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인간으로서의 고뇌에 직면한다.




갑자기 내 주위의 세상도 상처에서 회복되었고, 나는 나와 함께 지옥에 떨어졌으나 거기서 살아 나오지 못한 한 여인이 이름과 얼굴을 떨칠 수 있었다.

내 글쓰기는 얼마 전과 똑같았으나 전혀 다른 모험으로 변해 있었다.


주기율표 p.225


각 원소마다 프리모 레비의 삶의 여정이 담겨 있는데, 그중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부분은 아우슈비츠에서의 포로생활을 마친 후, 니스 공장에서 일하던 일화가 담긴 '크롬' 편이다.


어느 날, 상사는 레비에게 '겔 상태'가 진행되어 사용할 수 없던 '니스'를 원상태로 회복시킬 방법을 찾아보라고 지시한다. 그는 대학에서 배운 화학적 지식을 총동원해 원인을 분석하며 해결책을 모색했고, 그 과정에서 몰두하는 동안 어느 정도 아우슈비츠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또한, 이 시기에 그는 평생의 반려가 될 여인을 만나 사랑을 이루게 된다.




눈을 감고 귀를 막기로 작정한 사람들만 독일 천하의 유럽에서 유대인들에게 닥칠 운명을 믿지 않았다.


주기율표 p.77



'아우슈비츠' '홀로코스트'라는 단어는 이제 너무 흔해져서 우리가 그것을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아는 것'과 '안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그 의미나 중요성을 되새길 기회를 놓치고 표면적인 이해에 머물게 된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역사적 ·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우리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이러한 문제들이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도 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많은 이탈리아 유대인들은 독일의 위협이 자신들에게 직접 닥칠 운명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러나 무솔리니가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을 수립한 이후 그들은 더 이상 전쟁의 '타자'가 아니라는 현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결국, 그들은 '죽음보다도 나쁜 테러의 목격자'가 되어야 했다.




당시 침묵하는 다수자였던 독일인들 사이에서 가장 흔한 전략은 최대한 적게 알려고 하는 것, 그래서 어떤 것도 묻지 않는 것이었다.

그 역시 그 누구에게도, 자기 자신에게조차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맑은 날이면 화장터 소작료의 불길을 부나 공장에서도 볼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주기율표 p.320


독서모임의 리더를 준비하면서 프리모 레비의 다양한 작품을 읽었다.

'이것이 인간인가'를 비롯해 '휴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그리고 '주기율표'까지.


좋은 책은 늘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그리고 그 질문들은 과거의 문제를 현재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며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사회적 역사적 문제들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프리모 레비'의 작품들을 읽으며 나는 왜 유대인들이 유럽에서 핍박받았는지, 나치는 왜 그렇게 잔인하게 유대인을 학살했는지, 유대인들이 왜 오랜 세월 동안 정처 없이 떠돌아야만 했는지.

그리고 더 나아가, 현재 중동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분쟁의 원인에 대해 깊이 들여다보게 되었다.



프리모 레비의 묘석



아우슈비츠에 대해서는 모든 독일인이, 아니 모든 인간이 대답해야만 한다.


주기율표 p.323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에서의 경험으로 인해 삶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는 그 참혹한 기억을 글로 풀어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절박했기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한다.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레비는 아우슈비츠에서의 참혹한 기억을 증언하고자 했고 인간성이 말살되는 극한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나치가 그의 팔에 새긴 수인번호 '174517'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힌 상징이었으며, 동시에 레비가 경험한 만행을 잊지 않고 증언하기 위한 기억의 표식이었다.


그는 평생 그 번호를 몸에 지니고 살았고, 죽음 이후에도 그의 묘비에는 '174517'이라는 숫자가 새겨졌다.

이는 그가 끝까지 간직했던 기억과 증언의 의지를 상징하는 마지막 흔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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