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하지만 용서할 수 없었던
"난 결혼 전부터 엄마가 정말 미웠어. 말을 해도 남의 속을 쑤시는 말을 해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셨어. 얼마나 나한테 욕을 많이 했는지 친구들이 너희 엄마는 친엄마가 아니라 계모라고 그랬다니까."
보통 사람들에게 '친정엄마'는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고, 마음의 안식처다. '친정엄마'라는 단어만 들어도 눈물이 흐를 만큼 따뜻하고, 늘 미안한 존재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친정엄마는 많이 달랐다. 평생의 숙제였고, 무거운 짐이었다.
"아버지가 사업을 하셔서 1주나 2주에 한 번씩 집에 오시는데, 한 번 오시면 뭉칫돈을 주시고 가셨어. 그날도 아버지가 뭉칫돈 주는 걸 봐서 학교 월사금 달라고 했더니 돈 없다고 못 주시겠다는 거야. 그래서 막 울면서 달라고 졸랐더니 빗자루 들고 돈 없으니까 나가라고 쫓아내더라고. 맨날 학교에 가서 월사금 안 냈다고 교무실 끌려가서 벌서니까 그게 너무 서러워서 그날은 어떻게 해서라도 받아내야겠다는 마음으로 도망치다가 어머니가 안 쫓아오면 다시 가서 울면서 조르고, 또 쫓아오면 도망가고... 이렇게 한참을 실랑이를 했지. 그랬더니 동네 한 복판에서 욕을 하더라. 저년 저렇게 뛰어가다 차에... 정말 자식한테 입에 담기도 힘든 욕을 하셨어. 나도 결혼해서 애 낳고 살아봤지만 아직도 그 말은 가슴에 사무쳐."
나도 차마 어머니의 말을 그대로 옮겨 적을 수 없어 뒷부분은 생략했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도 친구들은 꽃다발 받고, 졸업장 받고, 사진 찍고 그러는데... 난 아무도 없었어. 축하해 주는 사람도, 꽃다발 주는 사람도, 사진 찍어주는 사람도... 그래서 아직까지 졸업식 사진 한 장이 없어. 손자들 졸업식 때 사진을 찍는데 눈물이 주르륵 나더라고 그때 생각이 나서. 그런데 졸업식날 너무 서럽고,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갔는데, 엄마가 날 보자마자 ‘저년이 일하기 싫어서 어디서 놀다가 이제 들어왔다.'고 또 욕을 하는 거야. 와~ 정말 그날은 엄마고 뭐고 다 때려 부수고 싶은 심정이었어. 그래서 방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엉엉 울었지. 아버지가 오셔도 나가보지도 않고 방에 있었더니 아버지가 왜 우냐고 물어보더라고.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애 졸업식인데 왜 가보지도 않냐'라고 엄마를 나무라시는데 엄마는 여전히 당당해. '계집애가 그깟 공부해서 뭐 하냐'라고, '때려치우고 살림이나 해'라고 그러더라고. '동생들도 많은데 너 혼자 공부할 거냐'며..."
어머니는 일곱 딸 중 둘째였다. 아들을 간절히 원했던 외할머니는 딸이 태어날 때마다 실망했다. 외할아버지가 3대 독자였기에, 아들을 낳아 가문의 혈통을 잇는 일은 외할머니에게 삶의 가장 큰 책무였다. 딸은 태어날 때마다 '또다시 실패'를 의미했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떨어뜨렸을 것이다. 그 실망과 원망의 화살은 늘 어머니를 향했다.
"저년들 누가 좀 안 데리고 가나? 귀신은 뭐 하나 몰라, 저년들 좀 잡아가지."
외할머니는 이렇게 저주하듯 말했다. 어머니는 외할머니에게 들었던 이런 말들을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한참을 이야기하시다 잠시 말을 멈추시더니 조용히 말씀하셨다.
"그래도 나도 결혼해서 살아보니까, 어떤 부분은 엄마가 이해가 되더라고. 난 셋 낳아 기르는 것도 이렇게 힘들었는데, 우리 엄마는 여덟을 낳았으니. 그리고 내 밑으로 사실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금방 죽었어. 그래서 우리 엄마가 더 아들에 집착했을지도 몰라. 같은 여자로 보면 때론 안쓰럽기도 해... 그런데 그 사람이 우리 엄마라고 생각하면 정말 너무 짜증 나."
1950년대 말, 아직 산아제한 정책이 실시되기 전, 자식은 풍요의 상징이자 재물과도 같았다. 더군다나 아들 낳는 일은 대를 이어야 한다는 사명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일이었다. 그러니 외할머니의 삶도 언제나 조마조마했을 것이다. 빠듯한 살림에 여덟 명의 자식을 키우는 것은 전쟁과 다름없었을 것이다. 사업하는 남편은 망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에, 생존을 위한 투쟁은 사랑을 표현할 마음의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들 못 낳는 여자의 마음은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을 것이고, 눈앞에 보이는 딸은 자신의 지긋지긋한 삶을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 같아 인정하기 싫었을 것이다. 자신이 낳은 자식이 귀하지 않은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결국 누구보다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본능은 모성애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전쟁 후 어지럽고 가난한 시대와 남아선호 사상이 짙었던 우리 사회의 문화는 한 여자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었고, 그 분노와 슬픔은 자식에게 전달되어 또 한 여자의 삶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시간이 흐르고 어머니도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면서 외할머니의 냉정했던 행동들이 본인도 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조금은 이해하셨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용서하는 것은 달랐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들어야 했던 수없이 많은 가시 돋친 말들은 이해라는 말로 용서하기에는 너무나도 깊숙이 가슴에 박혀 있었다.
사실 자식이 부모를 미워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지옥으로 몰아넣는 일과 같다. 누구나 자신을 낳아 준 부모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하며, 부모를 존경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그런 부모를 미워하게 될 때, 자식은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한 깊고 무거운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외할머니는 미워할 수도, 그렇다고 미워하지 않을 수도 없는 모순적인 존재였다. 이런 모순은 어머니를 더욱 깊은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을 것이다. 어쩌면 어머니가 외할머니를 이해하려 했던 노력은 이 모순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자기 합리화였는지도 모른다. 부모라는, 누구보다 믿고 기대야 할 대상에게서 받은 상처는 결코 쉽게 잊히지 않기 때문이다.
잔혹했던 어머니의 어린 시절. 끝내 외할머니에게 단 한 마디의 사과조차 듣지 못한 채, 어머니는 그 상처들을 가슴 깊숙이 묻어야 했다. 그리고 그 상처들은 지금까지도 밤마다 어머니의 가슴을 무겁게 누르고 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