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여전히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 아래에 있었다. 어머니는 그런 암흑 같은 시절, 서울에서 태어나셨다. 전쟁 말기라 일본의 억압은 더욱 심했지만, 이듬해 곧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혼란스러운 해방 후의 삶은 여전히 가난과 불안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5년 뒤, 한국전쟁이 터졌고, 전쟁의 참혹함은 모든 희망을 앗아갔다. 어머니는 여덟 살 때 피난길에 오르셨고, 그날 이후 가난은 그림자처럼 어머니를 따라다녔다.
"엄마는 어렸을 때 꿈이 뭐였어요?"
나의 질문에 어머니는 차분하게 대답하셨다.
"꿈이 어딨어. 하루하루 무사히 살아내는 것이 꿈이었지"
그 말은 변명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가난한 삶 속에선 배부르게 먹는 것도, 제대로 배우는 것도 모두 사치였다. 외할아버지는 외동아들이자 독자였기에, 아들을 향한 집착으로 딸 일곱을 낳고서야 아들을 얻으셨다. 누군가에게 축복이었던 아들의 탄생은 딸들에게 재앙과도 같았다. 그러나 어린 어머니는 외할아버지의 소원이 이루어져 너무 기뻤다고 말씀하셨다.
살림은 어머니의 몫이었다. 학교에 빠지는 건 당연했고, 소풍은 꿈도 못 꾸었다. 졸업사진 하나 남기지 못한 채, 학교와 관련된 모든 것은 "먹고 죽을 돈도 없어. 이년아."라는 말로 거절당했다. 반찬, 옷, 장난감의 차별은 참을 수 있었지만, 배울 기회를 빼앗긴 아픔은 평생의 한(恨)이 되었다. 월사금을 못 내 졸업식에서 졸업장을 받지 못했던 그 순간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어머니의 가슴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다. 여자인 데다 돈까지 없었으니,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던 어머니. 그래도 배우고 싶어 몇 년 뒤 야학에 몰래 다녔지만, 결국 어머니께 들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아침이면 동생들의 도시락을 싸고, 머리를 빗겨 학교에 보내고, 잡화상에 앉아 하루 종일 물건을 팔고, 저녁엔 가게를 정리한 뒤 우물에서 물을 길어 왔다. 새벽 1시, 모두가 잠든 시간까지 일하고 귀가하는 아버지를 맞이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사업자금 융통도 어머니의 몫이었다. 특유의 넉살 좋은 성격 덕분에 동네 가게를 돌아다니며 돈을 빌렸고, 열심히 일해서 빚을 갚아 나갔다.
그리고 원하지 않았던 결혼. 결혼 후에도 친정의 어려움은 끝나지 않았다. 외면할 수 없어, 없는 형편에 도와주다 아버지에게 듣는 원망, 무관심, 분노 역시 모두 어머니의 몫이었다.
어머니는 그 모든 삶의 고난을 견디셨다. 악착같이 살아내 집도 마련했고, 친정도 차츰 안정을 찾는 듯했지만 하늘은 끝내 평온을 허락하지 않았다.
"뭐가 이래, 그렇게 이겨내며 살았는데 왜 또…"
아버지의 암 판정, 황반변성으로 잃어가는 시력, 가슴을 조여 오는 공황장애. 웃을 날보다 지긋지긋한 날이 더 많았지만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으셨다.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 다시 한번 살아보기로 결심하셨다. 그렇게 삶이 던져준 모든 운명을 악착같이 살아내셨다.
"이젠 정말 그만하고 싶어."
이 말씀을 하실 때면 정말 지치고 힘들어 삶을 놓고 싶어 하시는 것 같지만, 어머니는 아직도 살아내고 계신다. 다만,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 남의 손에 내맡겨지실까 걱정이시다.
결국 그날이 오겠지만, 어머니의 삶에서 대단한 한 가지를 배운다.
"삶이 나에게 어떤 시련을 안기더라도 나는 결국 모두 이겨낸다. 살아 낸다."
나에겐 어머니로부터 받은 그 DNA가 있기에 나 또한 살아 낼 힘이 있으리라 믿는다.
나에게 주어진 운명을 살아 내리라.
결국, 삶은 자신의 운명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악착같이 살아내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의 몫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의 아모르 파티,
어머니로부터 운명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이번 주는 어머니가 병원에 가셔서 만나 뵙고 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의 들은 이야기의 줄거리를 적으면서 제가 느꼈던 것을 담아 보았습니다. 다음 주에 다시 어머니를 찾아뵙고 연재를 계속 이어 가겠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