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 그 알 수 없는 거부감에 관하여
수요 글쓰기 모임 | 주제: 자존감
자존감. 새로 시작한 글쓰기 모임 첫 글감이었다. 주제를 정할 때는 호기롭게 쓰겠다고 했으나, 결국 다음 모임 시간까지 한 줄도 쓰지 못했다. ‘자존감’. 자주 보여 친숙했지만, 막상 글을 쓰려고 보니 깊이 생각해 본 적 없는 개념이었다.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모종의 거부감마저 들었다. 이 거부감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걸까. 종종 쓰던 말인데, 글을 쓰겠다고 생각하니 거부감이 들 것까진 뭐란 말인가!
내 자존감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있던가? 우울함의 끝을 달리던 20대 초반에도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 화는 났어도 자존감이 아작 났다 생각한 적은 없다. 자존감이 낮아서 그렇게 화가 많았던 건가? 지금도 화는 많은데, 말이지. 내 자존감은 아작 나 있는 건가? 잘 모르겠다. 자존감이고 뭐고 나는 그냥 어영부영 잘 있다. 나는 평소에 ‘자존감'이라는 말을 언제, 어떻게 쓰고 있을까. 주로 타인에게 혹은 타인에 관해 무례한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사람을 볼 때 “아, 저 사람은 자존감이 엄청 낮은가 보다.”하고 생각한다. 무례한 말로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며 스스로에 대한 만족감을 채우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나에게 자존감이란 내가 지켜야 할 것이라기 보단 오히려 무례한 상대방을 얕잡아 볼 때 쓰는 말이다. 나야말로 ‘자존감’이란 말로 타인을 비난하며 나에 대한 만족을 채우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나의 얕은 그릇을 드러내는 단어이기에 그토록 거부감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나의 치부를 드러내는 말이었음을 깨닫고도 어쩐지 이 단어가 주는 찜찜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좀 더 고민해 보니 문제의 원인은 금방 나왔다. 자존감이 의미하는 바와 별개로 이 사회에서 자존감이 활용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 개똥철학에 따르면 ‘자존감’이란 계속해서 성장을 요구하고 내일 더 잘 될 미래를 그려야 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좌절해 버린 주체를 응원하기 위해 활용되는 단어다. 신자유주의와 감응하는 자존감은 진정으로 개인을 자유롭게 할 수 없다. ‘나는 잘하고 있고, 가치 있고, 성과를 낼 수 있고’와 같은 문장으로 빚어내는 자존감은 결국 ‘잘 못 하고 있고, 가치 없고, 성과를 낼 수 없’으면 다시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 그냥 좀 못 하면 안 되는 건가. 나는 이 광활한 우주 속 먼지일 뿐이고, 그저 내 속도대로 알아서 살면 안 되는 건가? 누군가는 이런 나이브한 생각으로 살면 발전이 없다고 하겠지만, 발전을 꼭 해야 하는 걸까? 왜 남들도 인정할 만한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할까? 남들이 봤을 때 거지 같고, 내가 봐도 거지 같지만 그래도 적당히 견딜만하면 안 되는 건가?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란 목표가 정말 나의 목표일까? 나의 자존감은 내가 그다지 뛰어나지 않고, 난 그냥 무지렁이임을 받아들일 때 채워진다. 사회가 요구하는 목표 달성 중심의 성장이 아닌, 나만의 목표를 만들어 가면서 자존감을 단단하게 다져 간다. 진짜 자존감은 별 볼 일 없는 내 안에서 내가 만든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자존감’이란 말 자체가 잘못됐다거나 ‘자존감’을 되찾으려는 노력이 다 허튼짓이란 얘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 사회가 ‘자존감’이라는 단어를 활용하는 방식이 마음에 안 든다는 거다. 내가 꼭 어딘가에 쓸모 있는 존재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나 자체로 존재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