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있는 답장

바람이 지나간 자리

by 이설

사람이 떠난 뒤에도 시간은 그대로 남아 있다. 공간은 바뀌고 계절도 바뀌는데 어떤 시간은 특정한 감각에 달라붙어서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대전이신가요.'


그녀였다. 나는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가 답장을 보냈다.


'아뇨. 부산에 있어요.'


'만나는 사람은 있고요.'


'없습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 문장을 보냈다.


'부디 식사는 제대로 드세요.'


잠시 뒤 답장이 왔다.


'착한 남자.'


대화는 거기서 멈췄다. 화면이 어두워졌다. 방 안도 조용해졌다.


그녀가 톡으로 KCM의 <잊혀 가더라>를 보냈다. 애절한 목소리가 방 안에 남았다. 곡이 끝났는데도 머릿속에서는 사라지지 않았다. 같은 구간이 몇 번이고 다시 흘렀다. 아팠는데 익숙해졌다고, 빈자리가 버텨지더라고. 그녀는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날의 기분이었을까. 나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답으로 김동률의〈답장>을 보냈다. 너무 늦어버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이 그것밖에 없다는 노래였다. 그 곡을 틀었다. 낮게 깔린 목소리가 늦게 도착했다. 한 박자 뒤에서 멈췄다. 두어 번 듣다 멈췄다.


퇴근해서 돌아온 방에 불을 켜지 않고 누웠다. 창가의 가로등 빛이 바닥에 얇게 붙어 있었다. 손에는 낮의 감각이 남아 있었다.


처음 그녀를 본 날은 친구 집들이 다음 날이었다. 친구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내가 대신 돕고 있었고 그녀는 아르바이트로 그 자리에 와 있었다. 좁은 공간에 몸을 써야 하는 일들이 쌓여 있었다. 자재가 부딪히는 소리와 물기 어린 바닥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녀는 말이 적었다. 작은 체구였지만 그 공간 안에서 가장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재생 버튼 위에 손을 얹어두고만 있었다.


나는 말을 오래 붙들었고 그녀는 감정을 먼저 꺼냈다. 말이 늦어질수록 마음도 늦어졌다. 그 사이에 거리가 생겼다. 나는 그게 나쁜 거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가 움직이는 속도가 달랐을 뿐이라고. 하지만 속도가 다른 두 사람이 같은 방향을 오래 걷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각자의 선 위를 걷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연락을 끊겠다고 했다가 다시 연락을 했다. 그 말들을 끝내 주워 담지 못했다.


어떤 관계는 그렇게 닳는다. 몇 개의 장면과 몇 개의 말만 남긴 채.


물기 어린 바닥 위에서 묵묵히 자재를 옮기던 작은 등이 떠올랐다. 그날의 공기와 그 목소리가 한데 섞여 들렸다.


바람이 부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이면 그 시간이 올라온다.


'착한 남자.'


봄이 시작되고 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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